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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가야의 성립과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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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1. 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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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가야의 성립과 쇠락

가야는 낙동강 서쪽지방에서 여섯 개의 작은 연맹체로 건국되었다. 가야의 건국 설화에는 가야 아홉마을의 우두머리들이 무리를 이끌고 구지봉에 올라가 구지가를 부르면서 하늘로 부터 황금알을 얻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여섯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들 모두 각기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6가야의 수장을 의미하는 형태의 존재였다.

가야 개마무사 복원

6가야 중 가장 먼저 국력을 키운 것은 김해의 금관가야였다. 낙동강 유역의 충적평야에서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발달한 금관가야는 낙랑군과 왜와의 교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부상하였다. 그리고 1세기 무렵에는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중국, 일본과 교역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가야는 철이 많이 생산되었기에 이를 특산품으로 하고 덩이쇠등을 교역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계무역 기지로서 경제력을 쌓아 나갔다. 

그러나 가야는 각가의 소국으로 나누어져 연맹체까지는 통합을 이루어 냈으나 중앙집권을 이루지는 못했다. 고대국가로 발돋움하지 못한 데에는 가야의 지리적 여건이 하나의 이유로 주목된다. 가야의 근거지인 경상도, 전라도 일부 지역은 고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하나의 세력이 다른 세력을 통합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다르는 지역이었다. 분지는 공격은 어려우나 방어는 쉬운 지형으로 가야는 압도적인 강국이 나와 중앙집권을 이루기 어려운 지형을 갖고있었따. 

그리하여 소국들은 각자가 교역을 통해 경제력을 쌓고 각자의 독립성을 존중하며 연맹체를 우지했다. 이들은 신라 건국 초기에 영토문제로 신라와 계속해서 영토다툼을 벌였으나 신라는 경상도 지역에서 중앙집권화를 이루어 왔기에 신라에게 번번히 패배하며 낙동강 동쪽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에 가야는 서쪽의 백제와 긴밀한 관계속에 신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4세기에서 5세기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가야는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고구려의 천도와 나제동맹으로 일부 가야는 세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이때 대가야를 통해 다시 연맹체가 연합하면서 일부 세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복속되자 가야 연맹체의 구성원들은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아라가야 등 일부 국가는 안라회의를 개최하거나 또는 백제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리고 554년 신라와 백제 사이에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을 때 가야는 백제의 편에서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가야 역시 백제와 함께 쇠락을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견제하에 한개의 소국씩 멸망하여 결국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가야가 사라지게 된 이유에는 앞서 서술하였든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압도적인 구심점을 가진 국가가 연맹체 내에서 출현하지 못한 점이 가장 컸다. 따라서 연맹체 수준에서 중앙집권화를 이룬 신라와 백제에게 야금야금 정복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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