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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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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1. 4.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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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 전성기

고구려는 내부적인 정비를 마치고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이는 이른바 삼국시대라고 불리는 동시대의 백제, 신라보다 앞서 정비된 것으로 고구려는 삼국간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받으면서 5세기 전성기를 펼쳤다. 광개토왕, 장수왕, 문자왕 때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펼쳤다. 거란의 일파인 비려를 정멀하고 요동을 차지하면서 영유권을 확보하였다. 고구려는 이 원정에서 육백개에서 칠백개에 달하는 촌락을 파괴했다. 이후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에 의해 살해된 뒤 원수사이로 전락한 백제를 공격했다. 숙원이던 백제를 공격한 근초고왕은 임진강 일대를 차지하고 본토 깊숙이 들어가 백제 수도로 진격하였다. 백제의 여러 성을 함락시킨 광개토 대왕은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한 노예"가 되기로 약속 받고 철군하였다. 동시에 400년에는 신라에 군사를 보내어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토벌하면서 이들은 물론 신라마저도 복속시켰다. 이로써 고구려는 대동강 이남에서 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되었다.

남쪽으로의 위협을 없앤 고구려는 서북에 있는 북위와 후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고구려가 남방 원정을 떠난 사이 이들이 고구려의 북쪽 경계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이때 차지한 요동은 농경은 물론 철의 매장량도 풍부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은 고구려의 국가 발전에 매우 중요하였다. 고구려군은 요하를 건너 후연의 영토 깊숙히 침투하여 요서와 요동을 모두 차지하였다. 이로써 700년전 한나라에 빼앗겼던 조선의 땅을 수복한 셈이 되며 동북의 부여와 수식마저 완전히 굴복시켜 흡수하였다. 광개토대왕의 이러한 정복사업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식마저 나타나게 하였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자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 또한 여러 나라로 분열된 중국에 대해서 다각적 외교를 펼치면서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초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대동강 유역에서 고구려의 전성기를 유지하였다. 동시에 남쪽으로 말고삐를 잡았는데 이에 위기를 느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고 북위에 구원을 요청해 양면으로 전선을 형성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고, 장수왕은 3만의 병력으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점령하고 도망가는 개로왕의 목을 베었다. 이에 백제는 금강유역의 웅진으로 도읍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포함하여 죽령 조령 일대, 그리고 아산만과 영덕을 잇는 남단까지 밀고 내려갔다. 중원고구려비가 그 증거이다.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대에 시작하여 장수왕, 문자왕대까지 이어진다. 이때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자신만의 세계와 천하관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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