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남경국민정부와 황금의 10년
1928년 장개석은 다시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복귀한다. 1927년 4월 수립된 남경국민정부는 4월부터 2차 북벌을 시작하여 완수하였다. 이 북벌은 대중 복이 없이 군벌들의 합류에 따른 혼성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표면적으로는 국민당의 지배아래 중국은 다시 통일을 되찾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군벌들이 별다른 혁명정신 없이 참여하였으므로 부정부패가 심하였고, 혁명정신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국민정부는 1928년 10월 정식으로 발족하였고, 국민당이 유일 집권정당으로 일당 지배를 시행하였다. 집권정당으로 등장하며 국민당은 기존의 혁명성을 거의 잃어버렸고, 군벌시대 보수관료들이 고위직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언론 검열은 물론 반대파에 대한 암살과 납치등을 하는등의 정치적 억압도 서슴지 않았다.
남경정부는 북벌당시 군벌들의 합류로 인해 중국을 통일하였으므로 그 안에서도 분파주의가 존재했다. 형식상의 통일에도 불구하고 타도의 대상이던 군벌들은 신정부의 실세로 군림하였고, 이는 여러 파벌이 생기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이 때문에 내전이 여러차례 벌어졌고, 이로인한 경제적 타격은 남경정부에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다.
특히 남경정부는 경제적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전통적인 국가세인 토지세를 지방 군벌과 정부가 장악했고 남경 국민정부는 상해나 도시의 상공업에서 나오는 일부 관세나 상공업세에 의존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경정부의 존재는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위치를 크게 올려주었다. 또한 경제와 건설 방면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이 이때를 황금의 10년이라고 부른다. 근대적 경제 발전을 위한 개혁시도 또한 일정정도의 성과를 이룬 때가 바로 이때이다. 종래의 이금제도가 폐지되고 통일 소비세가 신설되었으며, 염세, 도량형, 화폐단위 역시 통일되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안정적 세수를 구가한 남경정부는 경공업 발전을 위해 도시 인프라를 정비하고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인구 300만의 도시로 성장한 상해에서는 영화나 연극 같은 대중문화도 꽃피우기 시작했다.
남경정부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당시 성장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의 존재는 역시나 큰 위협이었다. 더욱이 호시탐탐 중국진출을 노리는 일본의 존재는 국가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사항이었다. 당시 국민당은 일본에 대해서는 양보와 타협으로 대처하고, 실력을 길러서 국내의 공산당을 먼저 정리하겠다는 ‘안내양외’ 정책을 세웠다. 국민정부의 성패는 이 정책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1927년 일본에 대한 국공합작 붕괴 이후 궤멸 위기에 빠져 있었고, 국민정부는 이틈을 노려 공산당의 숨통을 끊으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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