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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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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10. 1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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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항일 내전이 종료되었다. 중국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중국인 2000만명이 죽고 5000억 달러 이상의 손해를 입은 그야말로 상처뿐인 승리였다. 국민들은 신속한 회복과 경제건설이 염원이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헤게모니싸움이 남아있어 이들의 염원은 뒤로 밀린 상황이었다. 일본군을 피해서 중경으로 천도했던 국민당 정부는 부패로 인해 악명을 떨쳤다. 게다가 일제 점령이후 중경정부로 복귀한 도시들에서는 일대 혼란이 연일 이어졌다. 국민당군은 수복 도시들에 대해서 약탈과 압수를 진행했고, 이로 인해 도시의 경제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며 붕괴되어갔다. 마치 점령군같이 행동하는 국민당군에 대해서 도시민들은 강한 불만을 쌓아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아와 내전, 박해를 반대하는 학생운동들이 불법화 되기 시작했고, 중국민주동맹은 1947년 10월 불법화 되었다. 

국민당의 상황에 반해 중국공산당은 종전상황에서 약 19개소의 소비에트를 조직하였고, 모택동의 권위를 확립시키기에 이르렀다. 모택동은 연합정부론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전국적인 여론은 내전을 지양하고 평화통일을 바라는 분위기였다. 미국에서 파견된 마셜을 매개로 정전협정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공존은 쉽지 않았다. 

점차 심화되던 갈등은 결국 장개석에 의해 깨지게 되었다. 1946년 6월 26일 장개석이 정규군을 동원하면서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국민당군 160만명은 소비에트 해방구에 대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게다가 11월에는 민주당과 공산당을 제외하고 국민대회를 통해 헌법을 통과시켜 입헌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국민당의 행보에 공산당도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공산당은 도시와 철도를 점령한 국민당군에 대해서 게릴라 전술을 펼쳤다. 거기에 농촌으로 들어가 경작자가 토지를 가지게 되는 토지혁명을 진행하여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리하여 한때는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이 국민당의 손에 잠시 넘어가기도 했으나 곧 공산당 인민해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중공은 우선적으로 동북지역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국민당군을 고립시켰고, 여기서 승기를 잡았다. 이 기세를 몰아 화북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때가 1948년으로 이때 거의 승리가 확실시 되었고, 1949년 12월 정도에는 대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중국이 모두 공산당의 지배아래 들어간 상황이었다. 장개석은 50만의 군대와 함께 대만으로 패주하였다. 패주하면서 중국의 모든 보물을 비행기에 실어 대만으로 가져갔다. 

1949년 10월 1일에는 천안문 광장에서 모택동은 중국인민은 일어섰다 라고 말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새롭게 형성된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의 지도아래 독재를 취하는 인민민주주의 독재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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