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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일본의 중국침략과 2차 국공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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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10. 14.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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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일본의 중국침략과 2차 국공합작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이후로 남만주와 동북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1928년 남경국민정부가 성립하고 세계대공황이 닥쳐오자 일본은 만주와 몽골에서의 이권확보를 국가의 생존에 관련된 사항으로 인식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 하였다. 1931년 9월 만철노선 폭파사건을 빌미로 관동군은 동북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5개월만에 점령하였다. 관동군의 독단적 행동과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묵인으로 15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경정부는 국제연맹의 외교적 해결을 기다렸지만, 국제연맹은 그다지 구속력이 없었고 남경정부 역시 완강히 저항할 힘이 없었다. 만주사변으로 불린 이 침략으로 인해 1932년 3월 1일에는 만주국이 탄생하기도 했다. 1931년 리튼 조사단이 만주문제 해결을 위해서 파견되기도 하고, 만주의 공동관리를 주장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해버리는 등 외교적 마찰까지도 불사하였다. 일본은 계속 진격하였고, 화북 5성에서 자치를 내건 지방 정권을 만들어 남경국민정권의 영향력을 배제시키려 노력하였다.

이에 장개석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중공업을 발전시켰고, 170만의 병력을 갖춘 군대를 편성하여 총동원 체제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의 기존 노선은 민중의 항일 운동을 억누르는 기존의 안내양외 정책을 여전히 유지하였다. 

1937년 들어와 사태는 급변하였다. 7월 7일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일으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였다. 이에 중국측에서 자위항전 성명을 발표하며 전쟁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상해와 남경이 연속적으로 함락되었으며 점령 이후 남경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국민정부는 호북성, 사천성등으로 수도를 옮기며 계속 저항하였다. 1938년까지 일본군은 중국 전역에서 철도와 도시를 중심으로 점령을 계속하였으나, 서남지역을 후퇴한 국민정부에는 더이상 타격을 가할 수 없었고, 전선은 1944년까지 고착되었다. 1941년 미국과의 전쟁으로 일본이 더이상 중국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 덕분이기도 했다. 

남경정부가 일본에 대해 강경하게 나서지 않으면서 중국공산당은 항일 운동 발전을 당의 성장에 이용하였다. 장정 도중 발표한 선언등을 통해 국민당과 함께 세력을 연합해 항전을 추진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장정을 끝내고 중공은 계급투쟁 노선을 바꾸어 장개석을 끌어들이는 항일 방침으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거국적 항일 의지는 기치는 높았으나 좀처럼 합작을 이끌어내기는 어려웠다. 국민당은 일본과의 전쟁중에도 공산당 토벌을 위한 6차 포위작전을 감행하는 등 2개의 전선을 펼치는 악수를 두었다. 이러한 국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서안 사건이었다. 동북군 출신의 장학량은 서안을 방문한 장개석을 구금하고 내전중지와 항일전쟁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서 소비에트 정부는 특별구 정부로, 홍군은 팔로군 3개사단, 유격대는 신사군으로 개편되었고,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국공합작의 성립으로 일본에 대한 단일 항전노선이 마련되었으나 일본군은 여전히 파죽지세로 중국 북부와 남부에 대해 공격과 점령을 멈추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유격대는 화북지방에서 농민을 동원해서 후방지역과 철도를 공격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1936년 무렵에는 1만여명에 불과했으나 10년이 지난 1945년 무렵에는 100만에 가까운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성장에 놀란 장개석은 1941년 화남의 신사군을 양자강 이북으로 옮기도록 요구하고, 이동중인 신사군 9000명을 안휘성 남부에서 포위하여 섬멸했다. 이 사건으로 그때까지 유지되던 국공합작이 붕괴되었다. 

모택동은 지구전을 기초해 장기전을 준비하면서 농민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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