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중국 공산당과 홍군, 홍군의 대장정
러시아 혁명 이후로 중국에서도 꾸준히 공산당이 성장하였다. 이들은 도시의 중산계급을 통해 혁명을 이루려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으며, 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계속 투쟁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첫번째 합작인 1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였다.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개인자격격으로 입당하여 국민당의 체질개선, 공산당의 저변확대를 노렸으나 1927년 장제스의 지시로 이루어진 상하이 쿠테타에 의해 국공합작은 붕괴되었다. 상하이 쿠테타로 중국공산당은 타격을 입고 국공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국공합작의 붕괴 후 궤멸위기에 빠진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1927년 8월이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서 강서성 남창에서 세력을 모아 무장봉기를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이어서 호남성, 강서성, 광동성에서의 모든 봉기와 소비에트 건설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위기에서 새로운 혁명박식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모택동은 호남성 장사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강서성과 호남성의 경계에서 노농혁명군을 조직하였다. 모태동은 농촌인구가 압도적인 중국에서는 농촌에서의 농민혁명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은 모스크바와는 다른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홍군도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였다.
1927년 1월 정강산에서 하층 민중과 농민으로 조직한 홍군은 최초의 농촌 근거지를 건설하고 무장봉기에서 패퇴한 병력을 흡수하였다. 이때 유격 전술을 도입하여 국민당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대항하였다. 당시 공산당 중앙부는 여전히 상해나 대도시에 중심을 둔 노동계급의 혁명을 여전히 지향했지만 토지혁명과 홍군 건설에 대해서 점차 영향력이 커지자 이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3년에 걸쳐 홍군은 세력을 확대했고, 농촌지역에서 소비에트 15개소, 홍군 6만명이라는 거대 세력을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성장은 국민당의 견제를 불러왔다. 국민당은 전체 소비에트를 포위하는 거대 포위망을 구성하였고 소비에트의 절멸을 기도했다. 그러나 1차에서 4차에 걸친 국민당의 집중 포위공격은 실패하였고, 1931년에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중앙정부가 성립하였다. 당 중앙 위원회도 1933년 상해에서 강서성으로 옮겨왔다. 1933년 10월 장개석이 50만의 병력과 200대의 비행기로 시작한 5차 소비에트 포위계획으로 인해서 공산당은 1934년 강서 소비에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 홍군의 주력은 10월 국민당군의 포위와 추격을 뚫고 호남성, 광서성, 귀주성, 운남성, 사천성등을 거치는 기나긴 탈출을 시작하였다. 이 탈출을 대장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만 2500킬로미터의 거리를 1년에 걸친 대 탈출이었다. 이 탈출로 인해서 홍군의 병력은 8만여명에서 1만명 이하로 줄어들었고,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의 군사지도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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