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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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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9. 2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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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

신해혁명 당시의 호북성군정부

청조는 만주족을 중심으로 효율적인 한족분리정책을 통해 압도적 다수의 한족에게서 충성을 얻어냈다. 이를 통해 청나라는 200여년간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국방의 실패와 개혁의 실패, 그리고 민정의 실패로 청왕조에 대한 한족의 충성심은 천천히 사라져갔다. 청조의 무능과 부패에 실망한 한족은 반만혁명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를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손문이었다. 그는 청일전쟁 무렵 하와이와 홍콩에서 흥중회를 세워서 무장 봉기를 거쳐 청조 타도와 공화제 국가의 건설을 꿈꿨다. 그리고  1903년 거아운동을 통해 반 제국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청조의 모습을 목도한 학생들은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중국 내에서도 화흥회나 광복회등의 혁명 단체가 세워졌다. 결국 1905년 8월 도쿄에서 전국차원의 비밀정당인 중국동맹회가 결성되었다. 이들 혁명파는 중국 남부 변경지대에서 열차례에 걸친 무장봉기를 준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손문 주도의 변경혁명은 모두 실패하였지만, 1911년 호북성 무창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손문

국내의 혁명세력은 발전을 거듭하며 호북성에서 신해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국적 차원에서의 혁명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영향력은 각자의 성안에 그쳤다. 또한 그 안에서도 혁명파는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각 지방의 권력은 관료나 군인들에게 넘어갔다. 1912년 1월 1일 손문은 외국의 원조를 얻기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여 중국으로 돌아왔고,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하며 중화민국이 성립되었다.

남경에 세워진 임시정부는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남방 각성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역할을 할 수 없었고, 남경정부는 신군을 장악하고 있는 북방의 원세개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북진하지 못했다. 그 이유로는 각 성이 독립하자 소수민족들이 다수인 변경의 성들도 독립의 움직임을 보였고 중국 전체가 내전과 동시에 분열되고 와해될 조짐이 보이자 내전을 벌이기를 꺼렸던 것이다. 손문 등 혁명파는 반만혁명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소수민족이 중국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독립하는 것까지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민족주의에 기초한 제도를 제창하였고, 이로써 근대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원세개, 위안 스카이

1912년 2월 12일 청조가 굴복하고 양위를 선포하면서 원세개가 청조와 남경 임시정부를 대신하여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이 넘는 황제 독제 체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혁명파가 주도권을 잡지 못했기에 그 출발은 아슬아슬했다. 더욱이 원세개는 독재체제를 강화하면서  자신이 다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냈고, 그 부하들은 원세개를 저지하며 공화제는 결국 명목상의 제도로 남게되고 중국 각지는 군벌의 혼전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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