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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광서신정과 입헌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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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7. 1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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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광서신정과 입헌 준비

의화단 운동을 이용하여 열강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했던 서태후는 열강의 군대에 의해 의화단이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자, 어쩔수 없이 다시 무술정변으로 중단시킨 개혁을 다시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열강들이 북경으로 들어와 점령하자 서태후는  1901년 1월에 이른바 ‘변법상유'를 발표하여 광서신정을 지시했다.

서태후

신정이라는 것은 중앙 정부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진 한 것으로 사실상 중국 사회의 본격적 근대화는 이 광서신장에서 찾을 수 있다. 당면의 처한 위기에서 탈출을 목표로 했던 청조는 광서신정에서 신식군대의 창설과 훈련을 가장 중시하였다. 그리고 가장 많은 예산을 여기에 배당하였다. 그 예산으로 36진 규모의 신군을 편성해서 근대적인 군사력과 청조의 안전을 담보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청조가 중요시 하였던 사항은 교육이다. 교육개혁이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서구화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필수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과거제도와 서원의 결합체제는 서구화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할 수 없었으므로 그 자체를 없애버렸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학당을 도입하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부에는 학부가 설립되고, 새로운 학제도가 마련되어 신사층의 참여도 장려되었다. 학당과 학생의 수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교육개혁은 사회 전반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신정 추진의 재원확보 또한 청조에게는 새로운 숙제였다. 이를 위해서 산업 진흥정책이 함께 병행되었다. 1903년의 상부 설립은 열강의 요구로 만든 외무부와 더불어서 당나라 이후 1000년이상의 6부제 체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상부는 산업진흥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였고, 상공업자를 동원하기 위해 동업 단체인 상회 설립을 권장하였다. 그 결과로 1911년 무렵에는 상회수가 전국적으로는 900개 가까이 되었고, 임원수는 2만명에 달했고, 회원수는 20만에 달했다.

마찬가지로 교육회나 농회도 그 규모는 상회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각 성이나 전국단위의 연합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간단체의 조직화는 청조의 예상과 달리 신사층과 상인층의 발언권을 크게 확대시켰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국민의식과 민족주의적 자각이 폭발했고, 이러한 관심은 1905년 미국 보이콧 운동이나 철도와 광산의 이권회수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일본제국헌법

또한 청조 내부에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보고 이를 러시아'제국’과 일본 '입헌 국가’ 의 전쟁으로 보고 승리한 일본의 경우 그 요인이 입헌국가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퍼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헌법제정과 의회개설을 주창하는 입헌파의 주장이 크게 힘을 얻기 시작했다. 청조도 이에 대응하여 1906년 9월 입헌 준비의 상유를 내리고 이를 위해 중앙 관제를 개혁하고 1907년에는 헌정편사관을 설치해 법제와 규칙을 공포했다. 

그리고  1907년 8월에는 흠정헌법대강을 반포했다. 이는 메이지 일본을 모방하여 헌정실시 이전에 황제권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려했다. 이는 의회개설을 이유로 황제권을 강화하려는 생각이었다. 의회개설이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청조는 황제권을 강화하려는 목표가 있었고, 입헌파는 황제 권한의 견제였기에 이는 서로의 목적은 다른 이른바 동상이몽이었다. 

자정원

1909년에는 청조의 지방 의회 전신인 자의국이 설치되고 1910년에는 국회의 전신인 자정원도 설치되었다. 여기에 결집한 입헌파 신사층은 황제권에 대한 까다로운 견제자였다. 그러던 도중 1908년 11월 갑작스러운 서태후의 사망으로 만주족 귀족층은 권력을 좀더 집중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908년 여름에 예비입헌공회의 발기로 시작된 국회속개청원운동이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여러차례 조속히 국회 개설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청조는 1910년 11월 준비가한을 5년으로 단축하면서 양보를 거부하였다. 또 1911년에는 만족, 한족간의 균형을 잃은 황족내각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는 한족을 중심으로 한 신사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곧 청조의 몰락을 앞당기게 되었다.

또한 신정을 추진하면서 가혹한 세금과 수탈이 급증하고, 인플레이션이 나타나면서 부가세나 잡세 거부 투쟁등이 나타났다. 식량 폭동 또한 이 시기 나타난 농민 투쟁의 또 다른 형태였다. 장기적으로 볼 때 신정은 지식인, 신군, 새로운 정치 엘리트와 경제 상공업 계층을 만들어 내는 등 새로운 사회의 계층을 창출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청조의 몰락을 부추기고 청조 지배를 내부부터 붕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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