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중국은 1958년부터 국가경제건설 2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공업부분에서는 철강을 중심으로 발전계획을 구상하고, 농업에서는 곡물의 생산량을 늘리는 쪽으로 목표를 잡았다. 당시 소련은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등의 국제적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에 자극받은 모택동은 15년 이내로 철강생산량에서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캐치프레이를 내걸고 생산 대약진 운동을 펼쳤다.
농업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한정된 농지에서 곡물을 빽빽하게 심고 깊게 땅을 갈아내는 밀식과 심경을 이용했지만, 58년부터 시작된 자연재해가 61년까지 지속되면서 농업생산량은 급속한 감퇴를 보인다. 이러한 농업정책의 실패는 수많은 인민의 아사를 불러왔다.
또한 공업부분에서는 철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각지에서 용광로를 만들게 하고 철 생산량을 할당했다. 그러나 이는 재래식 방식의 흙 용광로에 불과했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생활용품을 용광로에 넣는 등의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할당량을 농기구를 용광로에 넣어 고철로 만들어 납품하는 웃지못할 일이 일어났다.
농업, 공업에서의 대약진 운동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이로인해 대기아가 발생하여 약 2,000만명이 넘는 중국인민이 사망했다. 1959년 팽덕회는 이러한 모택동의 잘못을 비판하고 실각하기도했지만, 국가주석과 당 주석이 분리되면서 모택동은 국가 주석자리에서 물러났다.
대약진 운동의 뒷 수습은 유기소와 등소평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경제 조정 정책을 통해 이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이때 흑묘백묘론도 등장하였다. 이러한 조정국면에 대해 모택동은 수정주의 모델에 비판을 가하였고, 이러한 갈등과 긴장은 모택동이 일으킨 무산계급문화대혁명으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의 시작은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문회보에서 시작되었다. 당 중앙의 다수파를 저격한 이 사건으로 모택동은 중앙문화혁명조소를 출범시켜서 투쟁을 확산시켰다. 이 투쟁에는 대학생과 중, 고등학생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홍위병이라는 이름으로 모택동을 호위하였다. 모택동은 “낡은문화와 사상, 습관을 파괴”를 제창하고 반동파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 했다. 이 무렵 모든 학교의 수업은 중지되었고, 다음해부터 대학의 신입생 모집도 중지 되었다. 학교와 교수, 교사를 비판하면서 시작된 홍위병 투쟁은 천안문 광장에서 문화대혁명을 축하하는 100만인 집회를 성공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기성 권위와 가치를 부정하면서 전국의 낡은 것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중국의 모든 문화재와 서적은 이때 불타버렸다. 이들에 의해서 ‘반혁명인사’로 낙인 찍힌 이들은 자아비판을 해야했고, 국가주석 유소기를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과 학자가 모독을 당하고 투옥당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번져버린 홍위병운동은 내부의 갈등과 노동자, 농민의 대립을 수반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을 만들어 냈고, 점차 폭력적 양상을 띄었다. 결국 정권을 다시 찬탈하는성 성공한 모택동은 이들 홍위병을 1968년 후반 홍위병을 모두 농촌에 하방시켰다. 홍위병이 도시에서 추방되면서 그들의 운동은 어느정도 종결되었고, 이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권력은 혁명위원회와 인민해방군이었다. 홍위병 운동의 마지막은 1976년 9월 모택동이 사망하면서 결국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은 혁명의 탈을 쓴 권력투쟁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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