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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표트르대제의 청년기 - (1682~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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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0. 2. 17.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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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표트르대제의 청년기 - (1682~1725)

표트르 1세 알렉세예비치 

표트르 대제는 유년기에 체계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고, 읽기와 쓰기도 거의 배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에 무엇이든 스스로의 힘으로 익히고 다양한 관심거리를 찾아 헤멨다. 이러한 성향은 전쟁놀이를 하는데에 특화되었는데 훗날 표트르 대제의 군사 프로젝트로 발전하기도 했다. 최초의 근위 연대인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와 세묘놉스키 연대라는 신식군대가 탄생하게 되었다. 두 연대 모두 표트르가 살던 마을과 인근 마을의 이름을 따왔다. 

또한 이 젊은 차르는 해군에 관심을 보였고 1694년에 아르한겔스크에 해군 조선소를 세웠다. 처음에는 소형 선박을 건조 했으나 곧 대형선박 건조능력까지 갖추게 되었고 차르 스스로가 그 업무에 대해 소상히 배웠다. 그는 이렇든 국정 운영과 전쟁의 모든 사항에 직접 관여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군대에 관해서는 특히 더 그랬다.

네덜란드 최대의 조선소 잔담에서 기술을 배우는 표트르

처음에 사병으로 복무를 시작해서 초급 장교로 승진하기 전까지 모든 무기의 사용법을 배웠고 보병과 수병 업무를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익혔다. 방대한 국토를 모두 보고 싶어했으므로 이전의 어떤 모스크바국 군주도 시행하지 않았던 여행을 했다. 게다가 1697-1698년과 1717년 두번에 걸쳐서 서유럽에도 행차했다. 이는 스스로의 배움에 대한 목적이 있는 방문이었는데 기술과 기능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젊은 차르는 결정적으로 자신과 국가를 분리 했다. 군사적 헌신의 대상으로 차르 자신이 아닌 국가를 위해야 한다고 구절을 바꾼것이 대표적이다. 

다분히 분주했고 거리낌 없는 개혁을 이루어나가던 차르 표트르에게는 별다른 조력자가 있지는 않았다. 자신의 궁정 사람들과 보야르 두마는 이러한 차르의 변화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차르는 자신의 세력을 모으기 위해 조력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출신이나 지위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끌어모았다. 이 시기를 러시아의 근대화로 칭하기도 한다. 

스위스인 르포트 같은 인물이나 독일에서온  뮈니히, 오스테르만 등의 외국 조력자들이 있었고 러시아인으로서 차르의 힘이 되어준 이들은 하층계급 출신인  멘시코프, 야구진스키등이 있었다. 특히 러시아인 조력자들은 모든 사회계층을 망라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봉직 귀족층이 수적으로 많았는데 해군 참모총장이던 아프락신과 재상이던 골롭킨등이 이러한 인물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출신의 프로코포비치 대주교가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변혁을 위해 많은 우크라이나 출신 성직자들을 차르의 세력으로 꾸준히 공급했고 이들은 표트르가 세력을 키우는데 일조했다. 

이후 자신의 모친이 1694년 죽고 자신이 완전하게 권력을 얻게 되자 차르는 자신의 세력과 개혁을 바탕으로 대외적인 군사활동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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