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표트르대제의 등장 - (1682~1725)
1672년 표트르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랴 키릴로브나 나리시키나 사이에서 알렉세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임 차르 표도르 3세가 젊은나이에 후계없이 세상을 떠나자 1682년 이복형인 이반과 공동차르로 선포되었다. 공동차르가 나타나게된 배경에는 제위계승법이 없었기에 당대 두 보야르 가문인 밀로랍스키 가문과 나리슈킨 가문이 제위를 두고 다투었다. 나리슈킨 가문이 내세운 표트르는 1682년 4월 차르에 올랐다. 그러나 한달 뒤인 5월 밀로스랍스키파가 모스크바에 집결한 스트렐치 연대의 반란을 사주했다. 나리슈킨가문의 인물들은 살해 당했고 반란세력은 보야르 두마를 통해 그의 이복형인 이반을 상급 차르로 선포했다.
상급 차르로 세워진 이반 5세는 통치를 감당할 수 없었고 표트르는 나리슈킨 파와 함께 국사에 관여할 수 없었으므로 섭정이던 소피아와 그의 측근들이 1682년 부터 1689년까지 모스크바국을 지배했다. 표트르의 이복누이인 소피아는 최초의 러시아 통치자로써 유럽과 관계를 확대하고 사상과 영향력, 기술등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소피아의 정부로 확실시 되는 외무대신 골리친 공은 이러한 소피아의 정책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농노제 폐지와 대대적인 교육을 포함한 서유럽 모델의 개혁에 대한 큰틀을 품고 있었다. 1686년 러시아는 폴란드와 항구적인 평화조약에 서명헀다. 이로써 러시아는 키예프와 그 일대를 자신의 영토로 완전히 합병할 수 있었다.
소피아는 크림타타르와의 전쟁을 겪으며 섭정인 자신의 존재는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통치자가 되고자 했다. 1689년에 소총병 부대, 스트렐치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샤클로비티는 자신의 부대를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했다. 소피아를 제위에 앉히고 표트르를 비롯한 그녀의 정적들을 없애려했다. 그러나 소총병 부대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샤클로비티는 반란을 시작했다. 이에 표트르는 자신이 살고 있던 프레오브라젠스코예 마을에서 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으로 한밤중에 피신했다. 이에 총주교와 많은 봉직귀족들, 심지어는 소총병 부대의 일부 연대까지 표트르 편으로 집결하였다.
당시 크림타타르와의 전쟁으로 민심을 잃은 소피아에게 많은 이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표트르 세력은 집결하는 반면에 소피아 측 세력은 약세였다. 결국 표트르의 누이는 싸움을 포기하고 남동생에게 굴복했고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샤클로비티와 그 측근들은 처형당했고 골리친을 비롯한 보야르들은 유배보내졌다. 그리고 이반과 공동차르로서 1689년 8월에 표트르는 러시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열 일곱의 표트르는 국사를 전적으로 돌볼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권력은 표트르의 모친 나탈랴의 수중에 떨어졌다. 나탈랴의 측근인 오빠 레프 나리슈킨과 요아임 총주교등 일부 반 서구화 세력이 집권하며 소피아의 제도를 바꾸어 나갔다.
1694년 표트르의 모친인 나탈랴가 사망하고 그 전에도 존재감이 없었던 이반이 1696년 사망하자 표트르 1세는 22세의 나이로 국가의 경영을 떠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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