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미하일 로마노프의 후계 - 차르 알렉세이 (1645-1676)
미하일이 1645년 마흔 여덟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의 유일한 아들이던 16세의 청년 알렉세이가 그 뒤를 이어 차르가 되었다. 알렉세이는 전반적으로 ‘아주 조용한’ 사람이라는 뜻의 티샤이시로 알려져있다. 알렉세이가 통치한 기간은 (1645-1676) 결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었다.
동란의 시대에 산적한 문제는 여전히 쌓여있었고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대중봉기가 만연했고 심지어는 모스크바에서도 반란이 발생했다. 당시 차르 알렉세이의 장인 밀로슬랍스키는 차르의 정책입안을 도왔는데 그 정책들이 문제였다. 또한 차르의 스승 모로조프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금세를 인상한다거나 담배를 파는등의 재정 정책을 폈는데 이러한 행동은 많은 도시민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모르조프와 밀로슬랍스키가 임명한 일부 무리는 도시민을 갈취하는 부패한 관리들이었다.
1648년 5월과 6월 모스크바 주민은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따. 최초 수공업자와 상인들로부터 시작된 반란은 곧 불만을 가진 봉직귀족과 소총병들에게 옮겨갔다. 반란세력은 젊은 차르에게 높은 조세에 대한 항의 성명을 제출했으나 알렉세이는 이들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곧 대규모 군중이 반란으로 들고 일어나 지배층의 집과 재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이 낸 화재로 인해서 모스크바의 많은 부분이 불타자 많은 도시들 역시 자극을 받아 다른 도시들도 반란에 휩싸였다. 1650년에는 프스코브와 노브고로드에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에서는 세금에 대한 부분을 양보 할 수 없었다. 대외적으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쉽사리 세금을 내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정부는 전쟁자금을 위해서 은화 평가절하를 진행하기도 했으나 이것은 위조지폐와 물가 폭등이라는 결과만 가져왔다. 오히려 1662년에 동전폭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670년 스테판 혹은 스텐카 라진에 일어난 카자크의 반란도 있었다. 약 2만에 달했던 반란군은 아스트라한 지역을 기반으로 발생했으나 1671년 진압되었다.
모스크바 정부는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시민을 달래기 위해 행정과 사법업무를 개선하는 조치를 취했다. 1649년 울로제니예 법전을 편찬하여 법 체계를 세우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울로지니예 법전은 1835년까지 약 200년 가까이 사용되었다.
또한 이때에 모스크바국은 1654년에 우크라이나까지 관할 권을 넓혔다. 이 우크라이나 땅은 1569년 이래로 폴란드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1624년부터 1638년까지 카자크들과 농민이 참가한 반란봉기가 우크라이나를 휩쓸었다. 폴란드 군대는 여러번의 전투를 거쳐 무자비한 방법으로 평화를 회복했지만 무력에의한 평화는 채 10년도 유지되지 않았따. 우크라이나 인들은 1648년에 유능한 지도자인 보단흐멜니츠키의 지휘아래 우크라이나 해방전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와 전쟁과 협상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모스크바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모스크바 정보는 몇번이나 이러한 지원요청을 받았으나 이러한 요청에 응하면 폴란드와의 전쟁을 의미했으므로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1653년 소집된 젬스키 소보르는 우크라이나 해방운동을 지원할 것을 차르에게 강력히 촉구했고 1654년 1월 페레야슬라블에서 중요한 조약이 성사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무리와 그들의 땅은 모스크바국에 통합되었다.
이러한 모스크바와 카자크가 연합하자 폴란드는 러시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13년 전쟁으로 이름 붙은 이 전쟁은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에 의해 종전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모스크바국은 폴란드의 약해진 군사력을 깨부수고 영토를 더욱 팽창시켰다. 드네프르강 우측의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에 양도되고 드네프르강은 새로운 국경선으로 역할을 하게되었다. 강 좌측에 있던 키예프는 예외적으로 모스크바쪽으로 양도되었고 1686년 조약에서는 러시아가 이 도시들의 항구적 소유자임이 확인되었다.
모스크바는 새로운 영토에 대해서 투르크와 오랜 전쟁을 벌여 왔는데 1681년 이 전쟁도 마무리 되었다. 이 시기는 러시아가 동란의 시기에 겪었던 혼란함과 복잡성에 버금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차르 알렉세이는 이를 잘 갈무리하여 폴란드, 스웨덴, 투르크와의 전쟁을 잘 마무리하며 모스크바국의 영토를 팽창시켰다.
차르 알렉세이의 계승자는 표도르 3세가 있었다. 그러나 14세에 차르가 되었다가 병약하여 20세에 사망하게되었다. 1680년 폴란드 출신의 귀족인 아가피야 세묘노브나 그루셰츠카야와 결혼하면서 궁정에서는 아가피야가 들여온 서양의 관습, 패션이 유행했다. 그렇지만 아가피야는 1681년에 있었던 첫 출산에서 아이들과 함께 사망했고 표도르 3세는 비탄에 빠지게 된다. 1682년 마르파 아프락시나와 재혼했지만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표도르 3세의 동생인 이반 5세, 표트르 1세가 러시아의 황제로 즉위했다. 표도르의 짦은 제위기 (1676-1682)는 메스트니체스트보를 폐지한 일로 유명했다. 이 복잡한 봉직 임명제도가 폐지된 1682년 이 문서는 불태워졌다. 이 문서가 불태워지므로써 후대에 등장할 표트르 대제때 개혁을 실시하고 국가를 통치하기가 수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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