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러시아사] 동란의 시대 (1598-1613) - 5. 러시아의 결집과 로마노프 왕조

TimeMap Project

by 에이구몬 2020. 2. 7. 14:44

본문

반응형

러시아사 동란의 시대 (1598-1613) - 5. 러시아의 결집과 로마노프 왕조

로마노프 왕조의 개창자 미하일 로마노프

공위기를 지나면서 차르의 제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로는 3명이 거론되었다. 첫째로는 폴란드의 왕자이며 모스크바의 일부를 점령한 플라디슬라프가 있었고 두번째로는 돌아온 투시노의 도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반 뇌제의 첫번째 아내였던 아나스타샤 로마노바의 조카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세번째 후보였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1610년 8월말에 러시아의 차르에 블라디슬라프를 올리기위해 폴란드군대의 지휘관인 졸키옙스키와 협정을 맺었다. 조건으로는 러시아 정교로 블라디슬라프가 개종해야하며 스몰렌스크의 포위를 풀것 등의 사항이 협정의 조건이었다.모스크바는 블라디슬라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폴란드왕과 협정을 마무리 짓기위해서 사절단이 출발하였다. 폴란드군은 모스크바에 완전히 들어와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투시노의 도적은 다시 칼루가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지기스문트3세

그러나 폴란드오아 지기스문트3세는 이 협정을 거부하였다. 블라디슬라프가 정교로 개종하는것과 스몰렌스키 포위를 포기하는것이 문제였다. 폴란드 왕은 그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이 러시아의 왕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절단을 체포하여 폴란드로 보내버리고 9년이나 붙잡아 두었다. 그 후 러시아 차르의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1610년 가을즈음 모스크바는 충격에 휩싸였다. 폴란드 군대는 다시 적으로 변했고, 폴란드왕과의 협상과정에서 폴란드왕자 블라디슬라프에게 충성을 바친 모스크바국에 스웨덴은 동맹을 저버리는 짓이라며 전쟁을 선포했다. 스웨덴군대는 북쪽지역으로 진격하여 노브고로드를 위협했고 스웨덴 출신의 필립공에게 러시아 차르를 넘길 것을 종용했다.

 정치와 사회적 갈등에 외세인 폴란드, 스웨덴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자 러시아는 결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의 교회가 단합을 주도했다. 모스크바의 총주교인 게르모겐은 블라디슬라프의 충성맹세에서 모스크바가 해방되었다고 발표했다. 블라디슬라프가 개종을 거부한 가톨릭 신자였으므로 총주교의 호소는 국가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 두 방향에서 호소력을 가졌다.

 

랴잔의 랴푸노프가 반응을 보여 병력을 집결해 1611년 모스크바로 행군해왔다. 그러면서 주변의 병력들이 합세했는데 그 중에는 투시노의 도적 휘하의 부대들도 있었고, 자루츠키의 카자크등도 포함되어있었다. 이들은 1차 국민군으로 불리우며 입법과 정책에 관여하는 대표자 성격을 띄었다. 

모스크바를 점령하던 폴란드 군대는 이러한 군사적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도시를 불태우고 크렘린안으로 도망쳤다. 상황은 러시아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는가 싶었으나 국민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지휘관 라푸노프가 살해당했다. 카자크는 일부 입법조치들이 봉직귀족 군대에게만 유리한것을 불만 삼아 지휘관을 살해 했고 1차 국민군은 일부 병력만이 모스크바 근처에서 포위를 한채 흐지부지 사라지게 되었다. 

 

그 사이 폴란드 군은 1611년 6월 스몰렌스크를 점령했다. 7월에는 스웨덴군이 노브고로드를 차지 했다. 칼루가에서는 마리나 므니제치가 투시노의 도적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 

2차 국민군을 조직하는 쿠지마 미닌

상황이 어지러운 가운데 새로운 해방운동이 볼가강 유역의 니즈니노브고로드시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의 대표 쿠즈마 미닌은 북동쪽의 도시들과 연합하여 대규모 군대를 조직했다. 과거 랴푸노프군대에서 장군을 맡았던 포자르스키공을 지휘관으로 삼아 제 2차 국민군을 조직했다. 

2차 국민군은 군대이면서 모스크바국의 행정부 역할을 맡아 1612년 모스크바를 포위했다. 제 1차 국민군의 병력을 일부 흡수하며 1612년 11월 초에 러시아 인들은 모스크바로 돌격했고 모스크바를 끝내 되찾았다. 폴란드왕은 직접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등의 노력을 보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젬스키 소보르는 차르로 미하일 로마노프를 선택했다.

 

제 2차 국민군은 1613년 초에 의회격인 젬스키 소보르를 구성했다. 500명에서 7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차르를 선출해냈다. 젬스키 소보르는 앞서 언급한 이반뇌제의 아내 아나스타샤의 가문에 속한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러시아의 차르로 선출했다. 

1613년 2월에 젬스키 소보르는 미하일 로마노프를 선출했고, 모스크바국 각지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이 의견수렴과정에서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결국 1613년 7월 21일 미하일은 차르로 즉위했다. 로마노프 가문은 이로써 1613년 부터 1917년까지 300년 넘게 러시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