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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동란의 시대 (1598-1613) - 3. 볼로트니코프의 반란과 새로운 가짜 드미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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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0. 2. 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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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동란의 시대 (1598-1613) - 3. 볼로트니코프의 반란과 새로운 가짜 드미트리

바실리 4세 (바실리 슈이스키) - 가짜 드미트리를 처단하고 새롭게 차르게 된 바실리

 

가짜 드미트리가 폐위된뒤 러시아의 차르는 바실리 가문의 슈이스키공이 이어 받았지만 러시아 사회의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국가의 권위는 더욱 약화되었고 반란 세력의 규모와 세는 강화되었다. 13년 사이 4명의 차르가 바뀌면서 정부의 통제력은 무너졌다. 게다가 격동의 혼란속에서 보야르들의 권력다툼은 일반 대중들에게 불신과 불만만을 가득 불러왔다. 실제로 바실리 슈이스키가 통치했던 1606년 부터 1610년은 단지 바실리가 차르라는것만을 나타냈을 뿐 대중적인 인정이나 영향력은 전무했다.

 

이에 반정부 움직임은 노골적이고 다양하게 나타났다. 바실리 슈이스키의 숙적 샤홉스코이공은 남부 러시아 도시들이 차르에 대항 하도록 부추겼으며 남동쪽 아스트라 한에서는 흐보로스티닌 공이 반란을 일으켰다.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에서도 지방당국들이 새로운 차르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가짜 드미트리가 살아서 도망쳤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았고 그 이름만 내걸기만해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회에 불만이 많던 하층 농노와 노예들은 혼란을 틈타 결집해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경우에 따라 그들은 모르드바 같은 토착민족과 연합하여 모스크바국에 대항하기도 했다. 

 

샤홉스코이와 볼로트니코프가 일으킨 남부의 반란은 모스크바국 정부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다. 볼로트니코프는 보야르인 샤홉스코이와 결탁한 카자크였다. 그는 샤홉스코이에게 자신이 바실리로부터 살아남은 드미트리를 만났다고 이야기하여 함께 반란을 꾀했다. 이들은 정의로운 차르 드미트리를 위하여 뭉치는것은 물론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샤홉스키-볼로트니코프 반란군

 

남쪽에서부터 모스크바로 진격한 볼로트니코프의 반란군은 1606년 10월 모스크바 성문 앞에서 정부군 지휘관인 스코핀 슈이스키에 의해 제지당했다. 이로인해 반란군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랴쟌과 툴라의 봉직귀족 부대는 계급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반란군으로부터 이탈했으며 이중 상당수는 바실리 슈이코프의 쪽으로 넘어갔다. 

모스크바 정부군은 1607년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여 툴라에서 반란군을 둘러싼 다음 4개월 동안 격렬한 포위공격을 벌였다. 툴라 일부를 침수시키면서 항복을 얻어낸 정부군은 지휘부인 보야르 샤홉스코이와 볼로트니코프를 유배시켰다. 

마리나 므니제치 (Marina Mniszech, 1588년~1614년 )는 폴란드 귀족의 딸로서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 의 황후였으며 두번째 드미트리를 자신의 남편으로 인정했다.

 

툴라가 함락되기 직전인 1607년 8월 새로운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우글리치의 드미트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와 달리 자신이 사기꾼이라는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부관들 역시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샤홉스코이와 볼로트니코프가 패배한 후 사회 불만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대규모 카자크와 용병, 모험가들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몰려들었다.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의 미망인인 마리나 므니제치는 그를 자신의 남편이라고 인정하면서 상황을 좀더 난해하게 몰아갔다. 

 

차르 바실리 슈이스키는 이 새로운 적을 과소평가하고 제때에 공격하지 않았다. 곧 이들은 세력을 결집하여 모스크바로 진격을 시작했고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1608년 정부군 지휘관 드미트리 슈이스키가 지휘하는 정부군을 패퇴시키고 모스크바로 접근했다.

그는 투시노라는 모스크바 근처의 마을에 본부를 설치했는데 후에 이를 일컫어 그는 “투시노의 도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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