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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역사] - 9. 자치정부의 형성과 태즈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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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0. 2. 10.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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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역사] - 9. 자치정부의 형성과 태즈메니아

 

1825년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된 랄프달링은 호주 자치정부시대를 열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이후 영국은 급속도록 식민지를 팽창시켰다. 이러한 식민지를 모두 관할하기에는 본토의 행정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따라서 식민지의 대부분을 자치령으로 승인하여 통치하였다. 호주에서도 그러한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뉴사우스웨일즈와 태즈메니아가 첫 자치령이었다. 뒤이어 빅토리아와 퀸즐랜드도 자치권을 획득했고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와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또한 자치권을 얻어냈다. 표면적으로 영국정부는 각 식민지가 독자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고 독립정부를 구성할 만큼 성숙된 사회 체계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만 앞서 서술했다시피 이는 영국정부의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지나지 않았다. 

 

호주에서 뉴사우스웨일즈와 태즈메니아는 최초로 자치정부 설립 권한을 획득했다. 태즈메니아는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면적의 섬으로 온화하고 안정적인 기후를 자랑했으며 지금은 사라져 버린 태즈메니아 선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태즈메니아 주에는 죄수유배 초창기 부터 영국인들의 거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국색이 가득한 건물과 도시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영국이 태즈메니아에 대한 본격적인 개척에 나선데에는 프랑스의 영향이 컸다. 나폴레옹은 지속적으로 남태평양에 탐사대를 보냈으며 이곳을 식민화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영국은 태즈메니아를 선점유하여 프랑스의 남태평양 진출을 무마하려하였다.

데이비드 콜린스 - 태즈메니아의 초대 총독이 되었다.

1803년 8월 필립 킹 총독은 존 보웬 해군 대위에게 태즈메니아 동쪽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웬 대위는 49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뒤이어 데이비드 콜린스가 300명의 죄수와 14명의 자유민을 이끌고 물이 풍부한 호바트 설리반 코브에 정착했다. 이로써 태즈매니아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번과 태즈메니아의 위치관계

처음에는 뉴사우스 웨일즈의 부족한 노동력 때문에 태즈메니아에 추가로 인력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1808년 태즈메니아의 인구수는 200명 이하까지 추락한다. 그러나 그해 노퍽섬에서 거주하던 554명의 인원이 이주해오면서 태즈메니아에 다시 활기를 불어 넣는다. 

노퍽섬에서 이주민들이 모두 태즈메니아로 오게 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었다.노퍽섬은 초기 시드니에 정착한 영국인들에게는 골칫덩이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유배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반란과 폭동으로 섬이 혼란에 빠졌다. 필립 킹 총독은 이 폭동을 잘 관리하고 자유민과 군인을 노퍽섬에 보내면서 섬의 질서를 통제했으나 필립 킹 총독이 영국으로 돌아가자 다시 아일랜드계 죄수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 정부는 1804년 공식적으로 노퍽섬에 대한 관리를 포기 했고 1808년에는 모든 사람을 태즈메니아로 이주시켰다. 

시드니의 생산기지 역할을 위해 개척된 뉴캐슬(당시 석탄항)

식량의 생산지이던 노퍽섬을 포기한 뉴사우스웨일즈는 새로운 식량생산기지로 지금의 뉴캐슬 위치인 석탄항을 개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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