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는 본디 프랑스에의해 처음 발견된 땅이다. 당시 영국 정부는 전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으로 인해서 인적, 물적 자원을 식민지에 투입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력한 경쟁자인 프랑스가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자 영국으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호주 대륙에 관심이 많던 나폴레옹은 1801년에 프랑스 해군을 보내서 호주 남부와 서부 해안을 탐색하게했고 이 지역을 프랑스 제국의 땅이라는 이름으로 떼르 나폴레옹으로 명명했다. 이어 1811년에는 호주 남부해안의 지도를 완성하고 1801년 호주를 탐사했던 드 프레이시넷을 다시 파견하여 1817년 부터 1820년까지 다시 호주 남부 해안지도까지 확보하고자 하였다. 뒤이어 1826년 프랑스의 탐험가 뒤몽 뒤르빌까지 호주 대륙을 향해 출항하자 영국 정부는 뉴사우스웨일즈의 당시 총독 랄프달링에게 서한을 보내 여건상 탐험하지 못했던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 본격적인 점령을 지시했다.
당시 뉴 홀란드, 즉 호주 대륙 전체가 영국의 영토임을 프랑스에 알릴 수 있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은 에드먼드 노키어 대령은 1826년 12월 20명의 군사와 20명의 죄수를 이끌고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킹 조지 사운드에 도착했다. 이들은 프랑스 탐험대를 조우하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영국 구기를 게양하고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노키어 대령과 같이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로 파견된 제임스 스털링 대위는 해안에서 새로운 정착지를 발견하였다. 이곳은 킹 조지 사운드로부터 약 400마일 떨어져있었는데 자연 항구와 비옥한 토지를 지닌 스완강 유역이였다. 스털링 대위는 곧바로 랄프 총독에게 이 사항을 보고했다. 총독 역시도 스완강 유역을 확보하고자 했으나 정작 영국 정부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추가 식민지 건설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재정부담으로 추가 식민지 개척은 어려운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새로운 식민지는 최초 발견자인 스털링 대위가 개인적 역량만을 동원해 개발되어지기 시작했다.
스털링 대위는 동인도회사 가문의 딸과 결혼하여 정계까지 인맥이 연결 되어있었고, 덕분에 상당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개인적 역량만으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발전을 이끌었다. 당시 동인도 회사는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 호주대륙 서쪽의 거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개발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그리고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개척에 미온적이던 영국 정부 역시도 프랑스가 호주대륙에 죄수유배를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태도가 바뀌었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가 필요하게되었다. 스털링대위는 공로를 인정받아 1828년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도 선주민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833년 눈가 부족의 예이건은 영국인과의 다툼으로 인해 머리가 잘려 그의 머리는 리버풀로 보내졌다. 또 1834년에는 스털링 총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기도 했다. 이 전투로 인해서 눈가 부족의 리더 칼유트를 포함한 80명이 전사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핀자라의 대학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척 초기의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는 지역 대부분이 황무지라는 점과 시드니로부터 약 4,800km떨어졌다는 지리적 약점으로 인해 개발이 지지부진 했다. 이 지역의 개발은 1839년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컴퍼니가 설립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다른 호주대륙의 주들과 달리 순수 정착민으로만 개척이 진행되다보니 개척이 더뎠고 인구증가도 더뎠다. 그래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역시 죄수 노동력을 받기 시작했다. 경제적 개발을 위해서는 죄수의 노동력이 필수적이었기에 1868년까지 죄수의 유배가 이루졌다.
죄수의 유배와 경제적부흥을 통해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는 자치정부수립을 추진한다 1887년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고 1890년에는 자치 정부 수립을 성공한다. 자치정부를 위한 재원은 1887년에 발견된 금맥과 광물자원을 바탕으로 런던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끌어오며 해결하였다. 특히 퍼스와 560km떨어진 쿨가디에 단선철도를 놓고 쿨가디의 금광을 통해 재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1887년부터 이어진 골드러시로 인해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는 13만명대로 급증했다. 정착 초기 서부 해안에 집중되던 정착지는 점점 더 내륙쪽으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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