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표트르대제의 전쟁과 개혁 - (1682~1725)
표트르대제의 사실상 섭정이던 모친이 죽고나자 표트르는 모스크바 정부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다. 표트르가 권력을 확보한 후 처음으로 한 국가적 사업은 대 투르크 전쟁이었다. 러시아 남부 흑해 연안에는 아직도 타타르 세력이 남아있었고 그들은 크림칸국이라는 이름 아래 남부 러시아와 흑해 연안을 통제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군주들은 대대로 타타르들과의 전쟁을 해왔고 표트르 역시 이러한 전임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그러나 아조프에 위치한 크림 타타르의 요새는 방비가 매우 단단했고 1695년 러시아군의 첫 전투는 패배로 끝이 났다. 아조프 요새는 바다에 인접해 있어 러시아군이 요새를 포위하더라도 바다를 통해서 보급을 받았기 때문에 러시아군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남아있었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아조프 요새를 공략했다. 그 해 겨울을 이용해서 돈강 유역의 보로네시에서 함대를 조직했다. 차르는 스스로 일했을뿐아니라 다른이들을 독촉했고 모든 지식과 외국인 전문가들의 조언을 동원하여 배를 건조했다. 1696년 5월에 배의 건조를 마쳤고 항해 가능한 30척의 선박과 약 1,000척의 수송선을 아조프로 끌고 갔다. 육로와 해로에서 아조프를 포위하고 압박하자 투르크인들은 7월에 아조프 요새를 포기했다.
선박을 이용한 해군의 저력을 깨달은 차르는 본격적으로 해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50여명의 청년들을 네덜란드, 이탈리아 , 영국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해군을 위한 선박건조와 항해술을 배워와 조국 러시아의 군대를 극대화 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파견되었다.
또한 차르는 스스로가 유럽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차서 대규모 사절단을 조직하고 신분을 속이고 사절단과 함께 유럽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사절단은 르포트가 이끌었고 약 250명으로 구성되었다. 1697년 출발한 사절단은 대륙을 횡단하며 나아갔다. 차르는 신분을 속이려 했으나 2m에 달하는 키로 인해 신분을 속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인들의 생활방식과 항해술등 유럽인들의 생활 전체를 흡수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독일과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합스부르크을 지났다. 빈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려던 상황에서 러시아 스트렐치의 반란 소식을 듣고 차르는 급하게 러시아로 돌아왔다.
스트렐치의 반란을 진압한 표츠르대제는 서구에서 배워온 것들을 러시아에 하나하나 이식하기 시작했다. 관리들과 군인들에게 턱수염을 깎을 것을 요구했다. 수염을 깎지 않는 이들에게는 수염세가 징세되었다. 상인과 수공업자는 물론이고 농민 역시도 턱수염에 대해 소액을 지불해야했다. 차르는 유럽에서 배워온 선진 문물로 러시아의 군대를 서구의 형태로 급속하게 재편성해 나가는 작업에 착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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