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역사] - 11. 빅토리아주의 발견과 정착
빅토리아 주의 포트 필립은 호주 남동부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멜버른을 보유한 만이다. 포트 필립이라는 이름도 최초 호주의 정착단을 이끈 아서 필립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802년에 존 머리에 의해서 발견된 포트 필립은 1828년부터 1830년까지 이루어진 내륙 탐사에 의해 정착지로서의 가능성을 확인 받았다. 당시 탐험대의 대장 찰스 스터트는 내륙탐사를 진행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 내륙의 거대한 호수를 발견하려는것이 목적이었다. 비록 내부에서 큰 호수가 발견되지 않아 탐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거대한 머리강을 발견하는 성과를 낳았다.
1836년 토마스 미첼은 이들의 탐사를 바탕으로 머리강 남쪽에서 비옥한 땅을 발견하고 측량사였던 자신의 임무대로 이 사실을 뉴사우스웨스트 정부에 보고하였다. 이에 뉴사우스웨스트에서는 1839년 찰스 조셉 라 트로브에게 이곳을 관리하게끔 하였으며 그는 1581년에 이 지역을 아우르는 빅토리아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빅토리아 주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빅토리아주의 기반을 다지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 총독들이 군인 출신으로 구성되는데 반해 그는 민간인 이었으며 관료 경험도 많지 않았지만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정착 초기의 빅토리아주에서는 양모산업이 번성했다. 양모 산업의 번성으로 빅토리아주는 인구와 재정수입에 있어서는 독립적 자치구역인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나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앞서나갔지만 여전히 뉴사우스웨일즈의 부속지역으로 인식되었다. 1843년 선출된 뉴사우스웨일즈 의회 36개 의석중 빅토리아는 오직 6개의 의석만을 배정받은데서 그들의 위치를 알 수있다.
이에 1846년 뉴사우스웨일즈 총독 조지깁스는 영국 정부에 멜번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식민정부 건립을 제안했고 1847년 영국 식민지 장관 그레이경은 새로운 식민지 명칭을 빅토리아로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뉴사우스웨일즈 의회는 빅토리아 지역이 차지하는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 때문에 이러한 독립을 수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예산 배정에 있어서도 불이익을 주는 사태도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제안을 의회가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1850년 11월 11일 포트 필립 지역은 빅토리아 주로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851년 7월 1일 빅토리아 주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된다.
뉴사우스웨일즈와 머리강을 경계로 남쪽에 위치한 빅토리아주는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과 뉴사우스웨일즈의 1/4수준인 7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빅토리아주에는 비록 작지만 멜번과 질롱이라는 도시가 있었고 면적 대부분이 기름진 목초지로 이루어져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 빅토리아주는 1851년 기름진 목초지를 기반으로 독립당시 6백만 마리에 달하는 양을 가지고 있었고 뉴사우스웨일즈보다 더 많은 양모를 수출할 만큼 호주 양모산업의 핵심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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