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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역사] - 7. 새로운 총독의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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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9. 7. 2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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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역사] - 7. 새로운 총독의 부임

 

필립 총독의 후임은 정해지지 않았고 군사령관 그로스와 패터슨은 3년간 죄수들로 하여금 토지를 경작하게 하여 큰 이득을 챙겼다. 



필립 총독이 떠난 뒤 3년후인 1795년 시리우스 호 선장 출신 존 헌터대령이 2대 총독으로 뉴사우스웨일스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헌터는 개척자 정신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시드니의 남쪽방향으로 탐사를 이끌어 캠든을 발견했고 골번지역까지 탐사했다. 이때 영국에 코알라와 오리너구리등 호주의 동물들이 소개되었다. 

 

존 헌터 총독은 휘하 해군장교들을 활용하여 해양 탐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들 중 해군 장교 매튜 플랜더스는 1802~03년 최초로 호주 대륙을 일주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존 헌터 총독은 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귀환하였다. 

 

3대 총독으로 부임한 필립 킹은 1800년 9월에 취임하였다. 그는 초기 정착지인 시드니와 패러메타를 기반으로 강력한 사회망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공정하고 균등한 식량분배를 강조했다. 그리고 죄수가 식민지 정부의 법망에서 벗어나는 먼 곳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면 그에 대한 관리, 감독권을 과감히 포기해버렸다. 그 대신 군인에게는 무한한 권리를 부여하여 무질서가 팽배한 새 정착지의 기강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군인 지상주의를 통해 필립 킹 총독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정착지의 확대였다. 당시 1800년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명령 아래에 호주 해안으로 탐험대를 파견하였으며 더 나아가 호주 대륙에 대한 침략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해군 장교였던 필립 킹은 프랑스를 물리치기 위해서 군함 컴벌랜드 호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곧 태즈매니아 서북쪽의 킹 섬에서 프랑스 탐험대를 발견하자 이곳에 유니언 잭을 게양하여 영국의 영토임을 부각시켰다. 

 

영국 정부는 호주 대륙과 태즈메니아를 연결하는 배스 해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태즈메니아 북쪽에 정착지 건설에 착수한다. 당시 고래잡이와 바다표범 잡이가 성행하고 있었던 테즈매니아 북쪽 해안은 1804년 10월 총독의 명령에 의해 정착지가 건설된다. 타마와 론세스턴 두곳에 정착지를 세우고 75명의 죄수가 노동을 했으며 이 두곳을 통해서 테즈매니아 전체를 관리했다. 

 

킹 필립 총독의 임기가 끝나는 1806년 까지 호주 대륙 일대에서 영국에 속하게 된 점유지는 뉴사우스웨일즈 와 노퍽섬, 태즈메니아 (당시의 반 디멘스 랜드)에 해당했다. 

 

뉴사우스웨일즈의 영역은 계속해서 넓어졌으며 시드니를 기점으로 남쪽 해안 160km까지 확대되었고 내륙쪽으로는 블루 마운틴 산맥까지 넓어졌다. 시드니 남쪽의 경우 맥아더 대령을 중심으로 천여명의 지주와 4천여명의 자유민, 2천여명의 죄수로 구성된 사회가 구성되었다. 

 

시드니 북쪽으로는 현재 시드니 사회에 불만이 많은 아일랜드계 사람들을 시주시켰다. 이들은 가톨릭에 대한 영국의 박해 때문에 호주로 이주되어온 탓에 불만이 팽배했다. 이들은 1800년 12월 반란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주동자 2명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1804년 3월 300명의 아일랜드계 인원들이 무기를 들고 패러매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주동자는 처형되었다. 

 

1806년 임기를 마치고 영국으로 귀국한 필립 킹의 후임으로 부임한 윌리엄 블라이 총독은 이전 총독대 부터 이어져온 식민지 시드니의 문제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윌리엄 블라이 총독은 이 식민지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새로 부임한 총독은 럼주를 매개로한 거래가 뉴사우스웨일즈 전체의 알코올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당시 필립 킹 총독의 비호 아래 기득권층으로 거듭난 군인 지주 세력의 기반인 럼주 거래를 연관시켰다. 

 

그는 군인들의 상거래를 전면 중단시켰다. 군인들이 상거래 독점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일반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게 당시의 식민지상이라고 판단한 블라이 총독은 장기적인 식민지 번영을 위해서는 이러한 군인 기득권층을 파괴하는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쌓여온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는 새 총독을 탐탁치 않아했고 곧 블라이 총독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기득권층으로 사회는 양분된다. 비록 블라이의 정책이 불평등을 해소하고 번영을 위한 길이었다 하더라도 사회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한 블라이 총독은 기득권층을 이기지 못하고 곧 사퇴하게 된다. 

식민지 정착 초기에 리더를 불명예스럽게 잃어야했던 영국 정부는 좀 더 세심하고 리더쉽 있는 총독을 엄선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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