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역사] - 6.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
호주에 상륙한 원주민들은 새로운 땅에서 개척하고자하는 의지가 매우 강렬했다. 정착지 주변에 주택과 오두막, 병원등이 세워졌고 현재 시드니 박물관이 있는자리에는 총독의 거주지로 사용되는 청사가 마련되었다.
시드니는 작물 재배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기에 영국인들은 내륙으로 15마일 더 들어간 페레메타에 새로운 정착촌을 만들고 거주한다.
필립대령은 뉴사우스웨일스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이들을 통솔했다. 먹을 것은 부족했고 약품과 물자부족, 거주지 문제 또한 심각했다. 이들은 식량을 훔치는것을 중범죄로 처리하였고 최대 사형까지 집행하였다. 이러한 정착촌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호주대륙에는 영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 뿐 아니라 자유 이주자들도 포함되어 들어왔다. 범죄자들 또한 중범좌자들만 들어온게 아니며 단순 경범죄자와 정치범, 종교적 박해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 까지 다양했다.
범죄자들은 무리를 이루어 식민지 정권에 대항하기도 했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 죄수들이 들어오면서 이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경제적 자립기반을 마련하고 결혼을 하는 생활수준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식량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부족한 식량사정은 필립총독을 궁지로 몰았고 그는 식량을 공급받기위해서 1788년 10월 함선 서플라이호를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으로 보낸다. 서플라이호는 1789년 5월 복귀하지만 식량 문제에 대한 미봉책이었을 뿐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1790년 4월까지 식량배급 사정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지급만이 이루어졌다.
뒤이어 두번째 죄수호송 함대가 1790년 1월 정착지를 향해 출항했다. 6월에 이 호송 함대가 잇달아 도착하자 정착지의 식량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필립 총독은 새로운 정착지가 식량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심각한 상황에서 죄수들을 더욱 보낸다면 이는 영국 본국의 부담으로 될것이라고 강력히 호소했다.
3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뉴사우스웨일스는 필립총독을 필두로 하여 자급자족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본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국의 지원에 의존하여 항해에 걸리는 시간은 큰 걸림돌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식민지가 기틀을 잡는데는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도 1792년까지 나름대로 도시의 면모가 갖추어지면서 농업이 자리를 잡았고 무역업과 고래산업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초대 총독이던 필립 총독은 1792년 말 총독직을 사임하고 귀국길에 올라 길었던 총독으로서의 임기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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