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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이반 뇌제의 통치 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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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9. 7. 2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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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의 통치 후반기

 

이반뇌제의 통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러시아는 근대국가이자 세계의 열강으로서 자리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이반 뇌제는 모스크바국의 귀족계층인 보야르 들과 길고 격렬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러시아만의 특이한 정치체제인 특선 평의회와 차르는 결별하게 되었고 이반 자신의 측근들과도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들은 이반이 추구했던 러시아의 보수적인 정치 전통을 급진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나타나는 부산물이라고 할 수있다. 이반은 개인적이고 절대적인 차르의 권력을 위해서 귀족계층인 보야르들에 맞서 투쟁하고 있었다.

보야르는 모스크바국이 러시아 전체를 대변하게 되고 차르의 절대권력이 최고조에 이른 이반 4세때 차르를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항세력이었다. 

모스크바국의 보야르들은 모스크바의 성장과 같이 폭발적으로 성장해왔다. 그 수 또한 그 성장세와 같았는데 15세기 전반에 약 40개의 보야르 가문이 있었던데 반해서 100년이 지난 16세기 전반에는 그 수가 200여 가문에 달했다. 이들은 러시아나 리투아니아 대공의 후손들이기도 했고 모스크바에 편입된 여러 분령지 공들의 후손이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출신에서 만큼은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배권을 확립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영향력은 절대 과장되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차르를 상대로 주도권을 잡지 못했으며 보야르 계층은 내부적 결속에 실패하여 조직력이 없었다. 

모스크바국의 임명체계인 메스트니체스트보는 보야르의 분열를 가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반 4세가 자신의 조언자들과 보야르에게 정치적 고립을 택한것은 가문과 관습에서 나오는 러시아의 정치체계를 변혁하고자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이반의 행동은 오로지 차르 개인의 심리적인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차르 이반 4세는 1553년 중병에 걸리자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게 되었다. 이반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자신의 아들인 드미트리에게 조언자들과 보야르들이 충성서약을 하기를 원했다. 힘들게 쌓은 모스크바국의 중앙집권체제가 다시 흔들려 러시아가 분열하는것을 원하지 않았기 떄문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보야르는 물론이고 자신의 수족과도 같았던 조언자들이 드미트리에 대한 충성서약을 주저하는것을 본 이반은 이 경험을 절대 잊지 않았고 권력의 정점에 서고자하는 욕구를 더욱 불태웠는지도 모른다. 

 

1560년 이반 뇌제의 핵심 조력자였던 아내 아나스타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반 뇌제는 이 사건을 독살사건으로 만들고 자신의 조언자이던 실베스테르 와 아다셰프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이 사건으로 두명의 조언자는 목숨을 잃었고 사건에 휘말릴까 두려웠던 일부 보야르 역시 리투아니아로 도망갔다. 

 

아내를 잃은 후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했던 차르는 1564년 말에 갑작스럽게 모스크바를 떠난다. 그 뒤 97를 이동하여 알렉산드로프라는 소도시에 들어가 한달간 기거한다. 한달 뒤 차르의 편지를 받은 모스크바의 수좌 대주교는 놀라운 내용을 발표한다. 편지의 내용은 이반 4세가 스스로 제위에서 은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차르는 제위에서 은퇴하길 희망하면서 보야르와 성직자들을 비난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로 인해서 전 모스크바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성직자들과 보야르들은 차르에게 모스크바로 돌아와 줄것을 간청하고 이반 뇌제는 자신이 내건 2가지 조건이 수용된 후에야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이반뇌제가 내건 2가지 조건은 오프리치니나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의 신설과 반역자들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오프리치니나는 원래 러시아 내부에서 약 20여개의 소도시와 농촌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던 특별 구역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오프리치니나는 점점 커지기 시작해서 전체 모스크바국의 1/3을 차지하는 크기로 변모했다. 이 행정구역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오프리치니키이다. 이들은 이반 뇌제 직속의 조직이었으며 현대의 헌병 또는 정치경찰의 임무를 행했다. 처음에는 천명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육천명 가까이 수가 늘었다. 이들은 차르의 적이라고 생각되는 존재를 파멸시키는것을 임무로 삼았다. 

 

이반 뇌제의 공포정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했다. 리투아니아로 도망갔던 보야르와 자신의 사촌인 블라디미르공이 자신의 조력자들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반역자들을 차르의 마음대로 처벌 할 권리 덕분에 차르는 점점 더 많은 혐의자들과 희생자들을 만들어냈고 보야르 뿐아니라 많은 수의 상인, 농민들이 숙청당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은 국가에 의해 몰수 되었다. 이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 대한 반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필립 수좌대주교 역시도 차르에게 항의했다는 명목으로 감옥에 내던져졌다가 오프리치니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유서 깊은 노브고로드 역시 1570년에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가 될 정도였다. 모스크바국은 멀리서 보면 강력한 내전에 휩싸인것 같았으나 가까이서 보면 피의 숙청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이러한 이반뇌제의 공포정치는 1572년 타타르들이 모스크바를 공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반뇌제는 점점 더 많은 배신자들과 반역자들을 발견했따. 고문과 처형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이반 뇌제의 삶 역시도 나락으로 치달았다. 그 정점은 1581년에 일어났다.  발작중에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반을 몽둥이로 가격해서 치명상을 입혔다. 그 이후 차르는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없었고 1584년 3월에 죽었다. 이후 소비에트 연합시절에 그의 시신에 대한 부검은 이반 뇌제가 독살 되었음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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