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역사] - 5. 이민의 시작
제임스 쿡 선장은 호주를 무사히 탐험하고 돌아왔지만 본국인 영국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1755년까지 영국은 미국의 13개 식민지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고 프랑스와 네덜란드, 스페인의 위협은 더욱 거세졌다. 급기야 1782년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고 1783년에는 미국에서 영국군이 완전히 철수한다는 내용의 파리조약도 맺게 되었다.
이러한 대외적인 상황보다도 심각한것은 내부적인 상황이었다. 영국에서는 계층간의 격차가 심해졌고 최상위 부유층의 과소비가 팽배했다. 최상위 층의 사치와 향락이 짙어질수록 극빈층은 빈곤과 폭력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전염병이 확산되고 알콜 중독으로 인한 범죄가 만연했다. 넘쳐나는 범죄자들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너무나 많은 범죄가 일어나는 탓에 감옥이 부족해지자 영국은 경범죄자를 면책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중범죄자들 역시 짧은 기간만 복역하게 하여 출소시키는 사례까지 생겨났다. 이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확산되자 영국은 러시아의 방식을 자국에 적용시키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범죄자를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내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 방안이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미국을 유배지로 활용하고 있었으나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발발하면서 이곳을 유배지로 활용 할 수 없게 되자 제임스 쿡의 동료인 조셉 뱅크스의 제안에 따라 1784년 범죄자들의 해외 유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호주를 유배지로 선정한것은 아니었다. 1783년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한 영국은 늘어난 범죄자와 반란자들을 다시는 영국에 돌아오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다. 1785년 200명의 죄수들이 아프리카 감비아로 유배되었지만 1년뒤 15%인 30명만 생존하였고 결국 조셉 뱅크스의 제안에 따라 뉴사우스웨일즈가 유배지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내륙으로는 탐사를 진행하지 못했고 다른 모험가들 역시도 해안에만 정박했을뿐이었기에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호주대륙을 유배지로 선정하는건 쉬운일이 아니었다. 또한 거리가 매우 멀기에 장거리 항해라는 비싼 대가를 치뤄야만 유배를 보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영국 정부의 결심을 늦추는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에도 불구하고 호주 해외 유배는 결정되었다. 당시 영국의 내무장관 시드니 자작은 750명의 죄수와 군인 180명과 기술자를 포함하여 함대를 준비시켰고 1787년 5월 13일 영국의 유배함대는 영국 남부 와이트섬에서 호주 대륙을 향해 출항하였다.
첫 유배 선단의 선장은 아서 필립이었다. 후에 1대 호주 총독으로 임명되는 그는 성실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였고 1500명을 11척에 나눠태운 대 선단을 순탄하게 이끌어 성공적으로 항해를 마칠 수 있었다. 정박지가 마땅치 않아 식수 공급이 어렵고 부족한 배 숫자 등 악조건이 즐비했지만 필립선장은 치밀한 계획과 리더쉽으로 오직 48명의 사상자만 내며 1788년 1월 호주대륙의 포트 잭슨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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