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신라의 부흥과 진흥왕의 영토확장
신라는 삼국시대를 함께한 고구려, 백제보다 전성기가 가장 늦었다.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탓에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뒤떨어졌던 신라는 6세기에 접어들면서 차근차근 발전의 기반을 다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6세기 초 지증왕 때에는 농업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농기구가 개량되고, 소를 농사에 사용하는 우경이 본격화 되면서 생산량이 증대되었고 귀족들의 순장을 금지하면서 노동력 또한 무의미한 손실이 적어졌다. 이때 신라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사용하였으며 대군주를 뜻하던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중국식 칭호를 받아들여 왕으로 바꾸었다.
지증왕이 신라의 기틀을 세웠다면 그 다음 왕인 법흥왕은 국가 내적인 체제를 정비하였다. 먼저 법흥왕이라는 시호에 맞게 국가운영의 기틀이 되는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나 고구려와 같은 반열에서 중앙집권적 국기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관료체제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병부와 상대등을 설치하고 관복의 색을 등급에 따라 달리하는 공복제도 실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중국과는 다른 연호를 사용하여 대내적으로 왕권의 확립과 독자적 천하관을 과시하였다. 이는 국력의 축적으로 터져나오는 힘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으로 해석되며 중국과 신라는 동일한 하나의 국가라는 자각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법흥왕대의 치세는 다음 대인 진흥왕대에 신라가 비약적인 영토확보를 할 수 있었던 기반이기도 하다.
진흥왕은 가야연맹 전 지역을 정복하여 신라 관할에 두었다. 또한 단양을 점령하여 한강으로 진출 할 수 있는 물길을 확보하였고 이를 보급로로 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해 한강 상류의 10개 군을 빼앗고, 다시 백제를 배신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일대를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단양에는 550년경 세운 단양적성비가 남아있는데, 이 단양에서 물길로 한양까지 물자를 보급할 수 있었다. 이어 555년에는 한강 유역을 흡수한 뒤 북한산에 순수비를 시워 위세를 떨쳤다.
신라의 한강지역 진출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우선적으로 한강유역의 압도적 생산물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한강 하구와 서해의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동아시아 국제 무대에 우뚝 솟아오를 수 있었다. 또한 백제를 관산성 전투에서 격파하고 가야를 잔여 소국을 완전하게 흡수하려하였다. 아라가야와 비화가야를 차례로 정복하여 562년에는 대가야 마저 완전히 정복해서 낙동강 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곡창지대이기도 하면서 교통의 요지였던 가야를 정복하면서 신라의 국력은 더욱 강해졌다. 이어서 동해안을 따라서 북상하면서 함흥평야까지 진출하고, 황초령비와 아운령비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들은 진흥왕대에 진출했다가 다시 비열흘로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진흥왕은 국력의 팽창에 힘입어 법흥왕과 마찬가지로 독자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개국’이라는 연호를 사용할정도로 새로운 신라라는 의미를 담아 통치하였다. 또한 화랑도를 설치하여 귀족자제를 활용하였고, 이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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