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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 (수당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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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1. 1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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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 (수당전쟁)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남쪽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영토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 사이 중국에서는 5호 16국의 시대가 끝나고 유목민의 후손인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하였다. 수나라는 589년에 전국을 통일하고 넘치는 군사력을 대외적으로 돌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수나라는 북방에서 중원을 향해 무력으로 압박하던 돌궐을 여러차례 정벌하고 이간책까지 사용하면서 결국은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시켜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돌궐의 세력이 분열되며 약해지자 수나라는 기수를 돌려 북쪽이 아닌 동쪽의 국가 고구려를 약화시키려 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589년 영양왕을 필두로 말갈군 1만을 이끌어 요서를 공격하였다. 이에 수나라 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로 공격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수의 군사들은 먼 곳까지의 정벌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은 요하를 건너기도 전에 보급의 문제로 질병과 기근에 시달리다 철군하였다. 이때 육군에 비해 수군이 더 피해가 막심했다. 

수나라의 창시자인 수 문제의 뒤를 이어 수 양제가 즉위하였다. 양제의 즉위로 동아시아는 다시 전쟁의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양제는 즉위 초부터 황하와 양자강을 잇는 대운하 건설을 추진하여 국력을 소진하고, 북쪽에는 장성을, 남으로는 남월과 대만을 정벌하는 등의 정복사업과 토목사업을 펼쳤다. 수의 움직임을 긴밀히 관찰하던 고구려는 607년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를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 양제는 이러한 계획을 파악하고 612년 113만이라는 대군을 편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시 고구려가 동맹을 맺으려 했던 돌궐은 이미 수에 굴복당한 상태였으며 고구려는 수나라의 113만 대군에 홀로 맞서야했다. 

수양제

고구려는 수의 대군을 맞아 항전하였다. 평지성과 산성을 이용하여 국경을 방어하였고, 요동성의 경우 수나라 수십만의 병력에 둘러싸여 공격받았지만 무너져 내리는 성을 수리해가며 결국은 버텨냈다. 전선이 고착되자 수나라 양제는 별동대 30만을 편성하여 별동대가 고구려 내부로 직접 공격하게 하였다. 이 별동대는 평양으로 곧바로 진격하는 작전을 펼쳤다. 병력을 요동성에 묶어둔 뒤 보병으로 전격전을 펼친 셈이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함락시켜 전쟁을 빠르게 끝내겠다는 생각이었다. 동시에 수나라 수군도 산둥반도에서 출발하여 평양으로 곧바로 진격했다. 이들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한다는 계획을 폈다.

살수대첩

그러나 수나라의 별동대는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으므로 기동력이 떨어졌고, 작전기간 동안의 보급품을 스스로 짊어져야한다는 큰 리스크가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식량과 무기를 행군도중에 버렸고, 별동 작전 중 많은 탈영과 인원 손실이 있었다. 우중문의 별동대는 어찌되었건 평양에 도착해 수군과의 합류를 통해 보급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수나라 수군은 독단적으로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여 이미 산둥반도로 되돌아 가고 난 후였다. 우중문은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돌려 다시 본대로 복귀하였으나 고구려군의 계속된 추격을 받아야했다. 이때를 기다려왔던 고구려군은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에서 되돌아가는 수나라 군대에 총공격을 가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수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에 따르면 이때 30만명의 별동대 중 살아남은자가 2700명 밖에 되지 않는다고 전한다. 

그뒤에도 수 양제는 여러차례 고구려 정벌을 계획했다. 이듬해인 613년, 614년에도 고구려 침입을 준비했으나 613년의 침입은 압록강변에서 막혔고, 614년의 침입은 요하를 건너기도 전에 막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은 완전히 저지되었다. 이러한 고구려 정복전쟁을 무리하게 추진하던 수나라는 내부에서 일어난 봉기로 3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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