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옹정제의 개혁정치와 개토귀류
청은 강희제 연간에 전성기를 누렸다. 강희제는 61년이라는 오랜기간동안 통치하며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할 수 있었다. 1722년 강희제가 사망하면서 그의 후임으로 4남인 옹정제가 즉위하였다. 옹정제는 치밀하면서 성실하기까지 한 성격으로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꾸준히 모으며 황제가 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후 강희제가 붕어하자 황좌를 놓고 대립각을 세우던 8황자, 9황자 10황자, 14황자를 창춘원에 감금시켜버리고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좌에 오른다.
옹정제의 통치기간은 겨우 13년이나 강희제 연간 말기에 나타나던 사회의 혼란상을 다시 바로잡은 것으로 그 업적을 치하하는 평이 많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나는 건륭제의 치세를 준비한 시기라고 평하기도 한다. 옹정제는 재정개혁을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정비하고 조세제도 자채를 개혁하였다. 이러한 개혁들은 시대적 요구를 합리적으로 수용하고 제도화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옹정제는 개혁을 위하여 진사 출신이 아닌 실무에 밝은 능리를 발탁하고, 등용하였는데 옹정제의 심복중 만주인 오르타이 한인 이위와 전문경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옹정제의 개혁중 가장 핵심은 지정은과 양렴은, 그리고 개토귀류였다. 지정은은 국가 재정수입 구조를 합리화하였다는 점에서, 양렴은은 관료와 기강을 숙정하는 근간을 마련한 제도였다. 지정은이 실행되자 조세가 토지세 항몽으로 단일화 되었다. 또 소작인들에게는 머릿 수 세금인 인두세를 면제하고 토지 소유자에게 이를 부담하게하여 극빈 농민층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복잡했던 세금 체계가 간결화되고 단순화되자 이를 착복하거나 중간에 사라지는 세금이 줄어들었다. 이로써 청조는 징세대장자를 명확하게 판별하여서 효율적인 징세를 시행할 수 있었다. 양렴은은 일종의 판공비로써 관리들이 녹봉으로는 생계유지가 불가능해지자 이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도록 지급하는 비용이었다. 관료들은 재정적인 압박에서 어느정도 벗어나게 되었지만 청조가 양렴은을 지급하므로 인해서 관료들은 청렴과 절제를 요구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제도는 개토귀류이다. 개토귀류란 지방 행정 개혁으로 중국 남서부 소수 지역의 족장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의미 하며, 중앙 정부는 관료를 직속으로 배치하고 내륙과 동일한 지방 행정 체제를 시행하며 반 독립적인 소수 민족 주거지를 내지화 하는 정책이다. 옹정제는 운남, 귀주, 광서, 호남과 사천등 소수민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에 대하여 지배권과 세습권을 가진 토사와 토관을 모두 청조의 관료로 대체하였다. 이들이 바뀌면서 한족 상인과 농민, 광산업자들이 소수민족의 땅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그 땅의 한화를 촉진했다. 반독립적이던 소수민족들은 한족의 머릿 수에 파묻혀 융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소수민족들이 순순히 그들의 정체성을 버린 것만은 아니다. 대,소금천의 반란처럼 일부 토사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 세계최강의 청조는 반란군을 압도할만한 병력을 보내어 진압하고 소수민족의 거주지에 대한 직접지배를 실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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