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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청의 기틀, 강희제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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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3. 30.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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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청의 기틀, 강희제의 시대

말년의 강희제

청나라의 기틀을 다진 홍타이지가 죽고 그의 아들인 순치제가 산해관을 돌파한다. 순치제가 죽은 1661년 청의 4대 황제 강희제가 8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한다. 강희제는 14살의 나이에 친정을 시작하여 내치와 외정 양 측면에서 눈부신 치적을 쌓았다. 강희제가 있었기에 청은 중국대륙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순치제가 산해관을 돌파한 이후 중원으로 들어온 청은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를 왕으로 봉하고 막대한 재정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반청세력을 소탕하는 충실한 사냥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눈엣가지와 같았던 반청세력이 이들 삼번왕에 의해 모두 소탕되자 청조는 삼번의 왕들이 중앙집권화에 방해되는 걸림돌로 보기 시작하였다. 토사구팽이라는 단어가 이럴때 쓰인다고 할 수 있다. 

삼번왕들의 불만이 터져나온 것은 철번청원 상황에서 청조의 행동때문이었다. 강희제는 광동의 상가희가 철번을 요청하자 이를 허락하고 운남의 오삼계와 복건의 경정충이 올린 철번 요청에 대해서도 승낙하였다. 청조가 이러한 철번요청을 승낙하는 것은 삼번왕들에게 산해관 밖으로 이주하도록 하는것을 의미했다. 강희제가 삼번요청을 불허하는 명령을 기다리던 번왕들은 이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1673년 11월 21일 오삼계는 천하도 총통을 표방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명조부흥을 부르짖으며 궐기하였는데, 남명 정권의 최후를 본인이 맞게하였음에도, 이러한 명분을 내걸었다는 것은 매우 설득력없음을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분상으로는 설득력이 없을수도 있었으나 청의 지배가 달갑지 않았던 한인들이 많아 많은 수의 인원이 오삼계의 반란에 동참하였다. 운남과 사천 섬서일대의 관료와 신사들은 대거 오삼계의 진영에 참가하였다. 오삼계는 세력을 이끌어 호남으로 진출하여 청조를 궁지에 빠트리기도 했으나 다른 두개의 번과 유기적인 작전을 펼치지 못하여 점차 수세에 몰리게되었다. 

오삼계

오삼계에 이어 경정충도 1674년 반란을 일으켰고 상지신도 이어 1676년 광주에서 반청 거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연이은 반란에도 불구하고 강남지방의 생산시설을 점거한 청조가 승기를 잡고 반란을 진압해 나갔다. 광동과 복건의 두개 번이 먼저 청조에 격파 당했다. 경정충의 경우 1676년 청군에 투항하였고 상지신 역시 이듬해인 1677년 청군에 투항하였다. 궁지에 몰린 오삼계는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주라고 하였으나 곧 병사하고, 그의 손자인 오세번이 궈양부에서 즉위하여 황제의 자리를 이어나갔으나 1681년 이 오세번 마저 운남부성에서 자살하면서 삼번의 난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뒤이어 강희제는 대만의 정씨 세력을 소탕하고 외몽골과 내몽골을 침입한 준가르부의 갈단을 물리치고 변방의 위협을 제거하는 동시에 외몽골을 신속시켰다. 또한 흑룡강 연안에서 추돌하던 러시아와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국경을 확정해 두어 대내외적인 평화를 확보했다. 대만이 확보되면서 강희제는 명대로부터 이어져온 해금을 풀고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에 해관을 설치하여 해외 무역을 허락하였다. 무역이 재개되자 은부족으로 야기된 극심한 경기 침체가 가시고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졌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은이 중국으로 대량으로 유입되며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질 수 있었다. 

경제상황의 호전은 대규모 치수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황하의 치수, 대운하의 보수와 유지에 많은 비용을 쏟았다. 그 덕에 남방의 풍부한 물산과 세금을 북경으로 온전히 전달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강희제는 여기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대내외적인 평화와 경제적 번영, 거기에 한인과 관료를 포섭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통해 정치적 안정까지 더해지면서 청나라는 강희제 연간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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