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명말 이자성의 반란과 농민봉기
16세기 말로 들어가면서 명의 사회 모순은 극도에 달했다. 16세기 중반 장거정의 개혁으로 사회 혼란을 어느정도 바로잡고 민생안정을 도모했던 명이지만, 장거정이 죽자 관료와 환관, 신사층의 불만과 비난이 동시에 쏟아지면서 명의 체제는 천천히 붕괴되어 갔다. 특히 영하 보바이의 반란, 임진왜란, 파주토사 양응룡의 반란등 만력 삼대정으로 명은 장거정 사후 다시금 재정적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재정적자에는 황실 유지비용도 한몫하였다. 만력제를 비롯한 황족들의 사치 역시 재정적자의 원인이었다.
이러한 명의 적자재정을 메우기 위해서 전국으로 파견된 환관들은 은광을 개발하고 상세를 징수한다며 폭횡을 일삼았다. 이로인하여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민중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그 시각 중앙 조정에서는 동림파와 환관의 대립이 심해져 당쟁역시 심해지고 있었다. 중앙 정계가 혼란에 빠져 있을 당시 1627년과 1628년에 걸쳐서 섬서성 북부에서 가뭄으로 인해 대규모의 기근이 발생하였다. 대규모 기근은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에게 좋은기회였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인근 지역유지의 창고, 관아의 창고를 급습하면서 식량을 약탈하였다. 이들은 단순 폭도무리에서 집단을 이루어 도적집단으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농민뿐 아니라 탈영병, 마적떼등도 가세하였다. 이러한 세력의 우두머리로는 연안의 왕가윤, 안새의 고영상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섬서성 연안부지혀현 출신 이자성이 있었다. 그는 고영상 휘하에서 반란군 활동을 시작하였다. 1636년 서안으로 진군하던 고영상이 명군에 잡혀서 처형당하자, 이자성은 틈왕이라는 고영상의 칭호를 계승하고 그 무리를 이끌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명군이 계속해서 공격하자 이사정은 호북성 운양에 은거하고 세력을 보존코자 하였다. 이자성 세력을 괴롭한 명군의 정책중에 하나가 초무책이다. 명군은 반란군을 공격하고 항복한 세력에 대해서는 식량을 지급하고 자신의 원적지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에 반란군들이 애를 먹었다. 이자성이 은거한 뒤 1639년 화북 지방에 기근이 덮쳐 유랑민이 속출하자 이자성은 이 유랑민을 규합하여서 세력을 형성하고 재기하였다. 이자성은 1641년 대민 정책을 선전하면서 반란세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자성이 선전한 민심책은 아래 네가지이다.
첫째는 균전, 면량, 요역을 부담시키지 않는다는 경제 정책이다.
둘째는 제폭휼민, 즉 부자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민생 안정책이다.
셋째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약탈하지 않고 거래한다는 군기숙정책이다.
넷째는 지식인을 존중하고 예우한다는 신사포섭책이다.
이 민심책들 중 눈여겨 볼것은 명말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한 조세와, 요역 부담의 불공평을 해결하기 위한 민심수습책이다. 또한 신사층을 포섭하여 독립국가 단계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정책을 가진 이사성은 1643년 호북성으로 진군한다. 그리고 이자성은 양양을 점령하여 양경으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신순왕이라고 칭하였다. 1644년에는 서안을 점령하고 서경이라고 개칭하였다. 이때부터는 국호를 대순이라 부르고 연호는 영창이라 하면서 국가건설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1644년 3월에는 북경으로 진격하여 무방비 상태인 북경성을 점령하고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따. 당시 명나라는 청나라의 거듭되는 공격과 이자성의 난으로 이중고를 겪었다. 그러나 청나라보다는 내부의 적인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므로서 명은 277년간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남아있는 관료들이 남경에서 남명을 세우고 청나라에 계속 저항하기는 하였으나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가 영력제를 살해하면서 남명 역시도 청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자성은 북경을 점령한 후 과거를 실시하고, 과거를 시행하는등 명의 체제를 흡수하는등 체제 정비에 힘썼다. 그러나 부호와 신사를 구금하고 재산을 빼앗으면서 이들을 지지세력으로 확보하는데 실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과 청의 경계를 지키던 명의 장군 오삼계가 청군과 연합하여 이자성 세력을 공격하자 이자성은 북경을 탈출 할 수 밖에 없었다. 호북성으로 도주하던 이자성은 1645년 통산현에서 향촌의 군사집단에게 피살당했다. 이자성 집단은 독립국가로 나아감에 있어서 살인, 약탈등의 도적시절의 행태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민심 수습책을 제시하고 농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한 시도는 이전의 농민 반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획기적인 움직임이었다.
비슷한 인물로는 섬서 출신 장헌충도 있었다. 장헌충 역시 대서라는 독립 왕국의 기초를 마련하는 듯 했으나 도적 출신이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다 민심을 잃고 청군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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