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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원의 멸망과 명나라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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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3. 9.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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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원의 멸망과 명나라의 등장

 

원나라가 중국의 패권을 잡고 통치를 시작한지 어언 100년이 흐르자 원나라의 통치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고 잇따른 자연재해와 기근으로 혼란이 이어지자 여기저기서 반란의 깃발이 일어났다. 몽골의 통치세력은 라마불교에 심취하여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고 이는 곧 피지배계층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중국 하남지방의 백련교 교주인 한산동과 유복통은 이러한 원말의 분위기를 간파하고 이용하였다. 이들은 백련교라는 종교를 이용하여 한산동이 송 휘종의 8대손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으며 정통성을 얻기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주모자 한산동은 즉각 붙잡혀 처형당했다. 유복통은 간신히 체포를 면하고 도망쳐서 안휘성 영주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새롭게 반란군을 일으켰다. 백련교는 반란균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이들은 삽시간에 하남과 안휘 일대를 휩쓸었다. 이들 백련교도는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또는 몽골인에 저항한다는 표시로 붉은색 두건을 두르고 활동하였다. 홍건적, 홍건군으로 불리우는 명칭은 이 두건에서 유래되었다. 

홍건적의 반란은 여러지역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한나라를 건국한 진우량, 하나라를 건국한 명옥진, 곽자홍 집단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 관염 중개인 출신의 장사성과 해운업자 방국진 등이 대표적인 항원 반란세력이었다. 

명 태조 주원장

 

이들 가운데 가장 강대한 세력은 남경의 주원장 , 소주의 장사성, 강서의 진우량이었다. 장사성은 자신이 구축한 지방정권에 만족하였지만, 진우량은 통일정권을 수립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몽골의 중앙정부는 이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이 축소되어 있었다. 이윽고 1363년 파양호에서 진우량과 주원장은 중국대륙의 패권을 두고 자웅을 겨루었다. 이 결전에서 주원장은 천신만고 끝에 화공으로 진우량군을 궤멸시키고 강남 지주층의 지원을 받아 진우량 잔당을 비롯한 군웅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주원장은 1368년 명을 건국하고 남경에 도읍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원나라의 대도를 함락시키고 몽골인들을 만리장성 북쪽으로 몰아내므로써 한족 왕조를 다시 건설할 수 있었다. 

몽골인들을 몰아낸 주원장은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권력의 중추를 장악하고 자신을 지탱해주던 강남 지주층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주원장은 1376년 공인의 안 사건을 시작으로 1380년 재상 호유용 사건, 1385년 호부시랑 곽환사건, 1390년 개국공신 이선장 사건, 1393년 대장군 남옥 사건등을 잇달아 일으켜서 10만명에 달하는 강남 지주층, 개국공신, 관료들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주원장은 재상을 없애고 문신들을 장악하여 권력이 황제의 수중으로 들어오도록 집중시켰다. 

주원장은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 남경에서 국가를 운영하였으며 장자를 황태자로 세우고 나머지 아들들은 변경의 왕으로 봉하여 몽골을 방어하고 황실의 안녕을 보위하게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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