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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몽골과 남송, 남송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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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3. 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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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몽골과 남송, 남송의 최후

몽골은 1234년 끈질긴 추적으로 금을 멸망시켰다. 뒤이어 몽골은 1235년 남송을 다음 목표로 생각하고 전투를 치뤘다. 전투의 시작은 몽골이 선수를 쳤다. 1년전에 있었던 남송의 화북 침공, ‘단평의 입락’에 대해서 남송의 책임을 물어서 이를 명목으로 병력을 남송으로 보내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남송의 방어가 생각보다 단단하고 몽골군대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게다가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면서 양측의 전쟁은 일단 종식된다. 

쿠빌라이칸

두번째 몽골군의 침략은 1258년이었다. 사천의 조어성을 배경으로 몽골군의 대대적 공격이 있었다. 뭉케 칸까지 친정에 나서 공격했으나 이곳에서 막혀 칸마저 사망에 이른다. 당시 징기즈칸의 막내 톨루이의 아들 쿠빌라이는 또 다른 대군을 지휘하여 양자강 중류의 악주를 공격하여 항복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그러나 뭉케 사후 몽골 중앙 정계의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며 조바심을 내던 쿠빌라이도 철수 하였다. 

악주의 함락을 포기하고 포위를 풀고 중앙정계로 복귀한 쿠빌라이는 1260년 자신의 세력이 가득한 대 회의, 쿠릴타이에서 후임 칸으로 선출되었다. 후임 칸으로 등극한 쿠빌라이는 수도인 대도를 건설하는등 국내 문제를 해결하며 시간을 보낸 뒤 내치가 안정되자 다시 남송을 공격한다. 1268년 새롭게 남송을 공략한 쿠빌라이는 요충지인 양양을 1273년 2월 점령한 후 번성 일대의 양자강의 군벌인 여문환을 투항시켜 양자강을 세력권에 넣는다. 

송의 마지막 황제 소제

양양 공방전의 결과로 남송은 곧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천혜의 해자였던 양자강을 잃은 남송에게 몽골의 기마병을 막을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양양 공방전의 싸움 이후 남송의 패망까지는 불과 3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양자강을 손에 넣은 몽골은 강을 따라 남송의 수도 임안부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남송의 수비병들은 하릴 없이 무너졌고 남송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했다. 

1276년 수도 임안이 함락된 이후 송나라는 망명정부 형태로 간신히 존속하며 몽골에 대항했다. 마지막 재상인 문천상이 최후의 4년을 분투했다. 홍콩 광주만의 애산에서 마지막까지 대항하던 송의 잔존세력은 쿠발라이의 몽골군대에게 완전히 패배하면서 비극적 최후를 맞게된다. 애산전투의 패배로 문천상은 몽골에 붙잡혔고 쿠빌라이가 그에게 투항을 권유했으나 뿌리치고 곧 사형에 처해졌다. 문천상의 죽음으로 인해 남송은 1279년 멸망하게 되었다. 

960년 조광윤이 세운 이후 300여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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