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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남송의 등장과 금나라, 끝없는 전쟁과 몽골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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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2. 2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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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가 정강의 변을 일으켜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흠종을 금나라로 끌고가고 송은 멸망하게 된다. 이에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가 남쪽으로 세력을 이끌고 도망쳐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고 금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 강남에서 송을 재흥하였는데 이를 남송이라고 부른다. 남송을 건국한 이를 고종이라고 한다. 북송이었을 당시에는 중국전역을 지배하였지만, 남송은 금에게 화북지방을 내어주고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남중국 일대만을 지배 할 수 있었다. 고종은 금의 공격을 피하여 양자강을 건너서 항주로까지 도망쳤다. 금 역시도 필사적 이어서 계속해서 추적하였다. 고종이 추적을 피해 항주로 수도로 결정한 것은 남송 건립 5년만의 일이었다. 1132년 항주를 임안으로 개칭하고 남송의 수도로 정했다. 

금의 공격을 막아낸 한족의 영웅 악비

당시 남송 정권은 금나라의 공격에 위험한 상태였다. 금나라 기병대는 수시로 양자강을 건너 남송을 공격했고 남송 정권은 어렵사리 막아내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송의 장군인 한세충과 악비등의 무장들이 활약하였다. 전선이 고착되자 금 역시도 계속해서 전쟁을 진행하는것이 여의치 않았다. 이들은 평화교섭을 진행하였다. 1142년 금과 남송은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남송에 매우 굴욕적이었다. 남송황제가 금의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고 매년 남송측이 막대한 물자를 바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연호가 소흥이여서 소흥화의라고 부른다. 

 

금나라는 1127년 북송을 멸망시킨 이후 눈부시게 발전하여 화북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요의 경우 연운 16주를 지배하는데 그쳤지만, 금은 화북 전체를 지배하였다. 금나라의 경제와 국력은 눈부시게 발전하였지만 여진인들의 중국화는 점점 빨라졌다.

 

금의 중국화는 해릉왕 시기를 거치며 가속화되었다. 해릉왕은 쿠테타를 일으켜 전 황제를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그는 중국의 문화를 동경하고 있었기에 국가체제도 중국식을 따랐다. 한인을 중용하였고 수도도 만주에서 현재의 북경인 중도로 옮겼다. 그리고 해릉왕은 남송을 멸망시키고 자신이 대륙의 유일한 황제가 되길 원하여 군대를 꾸려 양자강을 건널 준비를 하였다. 많은 여진 귀족들이 반대했으나 계획을 시행하였다. 양자강을 건넌 여진의 군대는 남송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채석기란 곳에서 참패를 당했고 해릉왕 마저 휘하 군대에 살해당하며 화북으로 귀환하게 된다. 

금 세종이 남북 교류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 처음 건설한 다리 , 노구교

해릉왕의 뒤를 이은 금의 세종은 서둘러 금을 수습했다. 남송과의 단절된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내치에 전념하고자 했다. 당시 금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여진인들의 중국화였다. 세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진의 문화를 부흥시키고 민족 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한인의 토지를 몰수하여 여진인들에게 분배하는 정책을 펴서 중국화를 막고자했다. 

세종이 금의 전성기를 구가 하고 있는 사이에 몽골초원에는 새로운 세력이 결집하고 있었다. 12세기 말 이러한 상황이 나타나자 금조는 서북 변경지역을 따라서 길게 계호라고 불리는 방벽을 구축하여 기마병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1211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에 대해서 공격을 본격화 한 것을 시작으로 금나라는 몽골의 군대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1211년 징기즈칸은 금의 수도를 포위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재물과 공주를 바치고 강화를 요청하였으나 몽골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1214년 금나라는 버티다 못해 중도를 버리고 남방의 개봉으로 수도를 옮겼으나 이를 도발로 여긴 징기즈칸에 의해 중도는 다시 한번 함락되었다. 개봉 역시도 몽골군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우구데이 시대에 함락당했다. 

금의 조정은 더 남방으로 도망갔지만 1234년 이마저도 몽골 기병대의 추적과 공격에 함락되어 금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아골타가 금을 건국한지 120년만에 금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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