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조광윤의 등장과 송의 중국통일
송 태조 조광윤은 중국 5대 10국 시대를 마무리한 후주의 장군이자 중국 송나라의 창시자이다. 후에 건국될 남송과의 구별을 위하여 북송이라 부르기도한다. 송 태조 조광윤의 출신은 무관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후당, 후진, 후당 등 3조를 섬기며 군관으로 근무하였다. 애초에 당나라의 관료 가문이었던 조광윤의 선조는 증조부 때부터 제위 찬탈을 노리는 군벌 휘하에서 군관으로 공로를 쌓았고 그의 아버지 조홍은은 당시 상당한 고위직 무관이었다. 그는 후당의 근위대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956년 사망하였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 946년 20세의 나이에 군에 입대한 조광윤은 후한의 장수였던 추밀사 곽위의 막료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후한의 대장 곽위의 휘하에 있으면서 공을 세웠다. 후한에 속해 군공을 세우던 도중 후한의 황제 은제 유승우가 거란을 격퇴하며 명성을 쌓는 곽위를 두려워하여 그의 일족을 몰살하는 사건일 일어난다. 또한 곽위 자신 역시도 목숨을 위협받았다. 그러나 곽위는 군과 함께 역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고, 후에 황제로 즉위해 후주를 건국하였다. 이 과정에 조광윤 역시 함께 참여하여 후주의 건국을 도왔다. 특이하게도 951년 곽위가 반란할 당시 일가가 멸족한 탓에 곽위의 후임 황제는 곽위와 성이 다른 시씨이다. 자신의 아내의 조카를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시영이 제위에 오르자 그가 후주 세종이다. 조광윤은 후주의 군관으로서 이러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곽위가 세상을 떠난뒤 후주 세종 시영의 부하가 되어 근위군 장관이 되었다. 이후 시영의 남정에 참여하며 군인으로서 권력을 잡게된다. 이후 시영이 죽자 그의 아들인 시종훈이 후주의 황위를 계승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일곱살에 불과했다. 따라서 5대 10국이라는 전란의 시대에 어린 황제에 불만을 느낀 군인들은 자신의 수장인 조광윤을 황제에 옹립했고, 이를 진교의 변이라고 한다.
거란을 향해 출정한 조광윤은 진교라는 소도시에서 군사를 돌려 개봉으로 돌아와 점령했고 공제로부터 황위를 선양받아 국명을 대송으로 칭했다. 963년 후주 세종의 업적을 기반으로 천하통일 목표로 하여 출병한다. 시기상 남쪽의 세력을 먼저 정리하였다. 963년 형남을 멸망시키고, 965년 후촉을 멸망시켰다. 남한을 971년, 975년 남당을 멸망시킨후 조광윤은 갑작스럽게 당돌에서 50세에 사망하게된다. 그의 후계자인 친동생 태종이 유지를 이어받아 오월을 978년 멸망시켰다. 그 후 북쪽에 위치한 북한을 979년 멸망시켰다. 이로써 송에 의한 중국통일이 이루어졌다.
당나라가 주전충에 의해 멸망한 907년 이후 약 70년간의 혼란기 끝에 중국 대륙에는 송이라는 새로운 통일국가가 틀을 잡았다.
송의 건립은 중국사의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정치가 황제 독주체제로 변하는 종지부를 찍었다. 정치적 요직에 모두 문관이 임명되는 문신관료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 지배계층도 귀족에서 사대부로 대체 되었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당대 이전과는 다른 사회의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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