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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세계제국의 붕괴, 당나라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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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2. 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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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세계제국의 붕괴, 당나라의 멸망

사사명(史思明), (703 ~ 761)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 이후 당나라의 국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당 중앙정부와 번진의 갈등, 환관세력의 강성함, 당쟁의 심화와 민생의 어려움이 모두 겹쳐진 결과였다. 변경에서 당을 에워싸듯 설치되었던 번진은 내지로 옮겨졌다. 번진의 역할이 변경의 방어가 아닌 반란 진압을 위한 역할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50개의 번진 가운데 40개의 번진이 내지로 옮겨졌다. 내지의 번진 가운데 일부는 징세, 사법, 군사등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소왕국적 면모를 가진 번진도 있었다. 특히 천웅, 성덕, 노룡등의 하북 삼진은 노골적으로 당 중앙정부에 저항했다. 번진을 당 중앙정부에 순응하게 만드는 작업 즉, 번진간섭은 당 왕조에게는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 황제와 중앙정부는 중앙 금군을 증강하는게 급선무 였고, 이를 위해서 가혹한 징세외에는 답이 없었다. 

안사의 난 시기부터 당 정부의 재정 상태를 호전시키기위해 선택한 정책은 소금의 전매였다. 이전까지 상인에 의해서 자유롭게 판매되던 소금을 정부가 전매하기 시작한 것은 758년 강회지역이였다. 이것이 큰 성과를 거두어 소금의 전매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시행되었다. 이러한 염법개혁으로 소금을 통한 세수확보 성공하였다. 문제는 너무 성공적이여서 재정수입의 절반이 소금전매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이 전매가 되면서 가격이 치솟아올랐다. 소농민은 정상적으로 소금을 살수 없어 소금 밀매업자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또한 차 역시 전매의 대상이 되었고, 차도 소금과 동일하게 밀매업자가 성행하였다. 

민생이 어려워지자 누군가 반란의 깃발을 들자 사람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 총대를 먼저 맨것은 번진의 병사들이다. 이들은 대우에 민감한 존재들이었으므로 절도사와 대립이 격화되었다. 강전태, 방훈의 반란은 번진의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반란이 길어지자 병사들뿐 아니라 근처의 농민들 역시 반란군에 참여하였다. 이러면서 이들이 주장하는 사항도 단순한 처우 개선이 아닌 평균 이념의 실현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황소의 장안 입성도

당에 유학했던 신라인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으로 유명한 황소의난은 중국 역사상 태평천국운동과 함께 중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반란이었다. 이 황소의 난의 주축은 소금과 차의 밀매업자였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황소는 당 왕조의 수도인 낙양과 장안을 향해 자신을 천보평균대장군이라고 자칭하며 빈부의 격차가 없는 평균을 행하는 장군이라고 말한것은  자신의 지지층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당 절도사 출신 주전충, 후량을 건국한다. 

반란은 번진의 자립화 움직임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고, 황소의 난이 휩쓸었던 화북, 화중, 화남이 피해가 극심했다. 또한 희종이 반란을 피해 파천했던 사천도 반란의 화를 피하지 못했다.  당 중앙정부는 장안 일대만을 지배하는 일개 지방정권으로 전락했고 주전충에 의해서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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