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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당 현종과 양귀비, 개원의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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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2. 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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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당 현종과 양귀비, 개원의 치세

당 제 6대황제 이륭기, 당 현종(756년 9월 10일~762년 5월 3일)

측천무후로 인해 잠시 중절되었던 당 왕조는 중종의 복위로 인하여 다시 복원되었다. 그후 예종이 즉위 하였고 다음으로 예종의 3남인 현종이 6대 황제로 즉위하여 당을 개원의 치세라는 전성기로 이끌었다. 당 태종 시기 300만 미만이던 호구가 726년에는 706만호로 늘어났다. 경제적 호황기를 맞아 쌀값도 저렴하였고 태평의 시대로 평가된다. 그러나 국가의 근간이던 균전제와 부병제등 율령체제가 붕괴될 조짐이 보이던 때 역시도 이때이다. 토지 환수가 안되어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균전제가 흔들렸고, 균전제 위에 기초한 부병제도 덩달아 부실해져 갔다. 빈농은 고향을 등지고 토지를 떠나 유랑민이 되어갔다. 

일본   에도 시대 의  화가   호소다 에이시 가 그린 양귀비 초상화

당 현종은 황후가 죽은 뒤 자신의 며느리인 왕옥환을 마음에 들어하며 그녀를 귀비로 책립한다. 태종이 한 방법 그대로 자신의 며느리를 아내로 삼은 것이다. 양귀비가 입궁하여 당 현종의 총애를 받자 이는 권력갈등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된다. 

안녹산

양귀비의 친인척들도 양귀비의 후광에 힘입어 득세하였다. 사촌오빠인 양국충이 득세하면서 당시 무장이던 안녹산과의 총애경쟁에서 마찰이 생겼다. 안녹산은 서역과 돌궐출신의 부모에서 태어나 6개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번장이었다. 안녹산은 정치적으로 이민족 무장을 중용했던 당 왕조의 정책과 함께 등장한 인물이다. 안녹산은 이 경쟁 끝에 결국 난을 일으키게 된다. 그의 병력은 당 왕조의 총병력 40%에 해당하는 18만의 병력이었다. 그는 755년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난을 을으키게 된다.  안녹산과 양국충의 갈등으로 촉발된 안녹산의 반란은 당시 부병제는 파탄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변경에서는 일이 계속해서 생기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했다.

안녹산의 난 당시 안녹산의 군이 장안에 미치자 그는 사천으로 피난을 떠났고, 반란군의 강요로 양귀비를 처형했다. 난이 겨우 평정되고 난 후 당 왕조는 힘을 잃게되고 실질적인 독립 소왕국이며 절도사가 지휘하는 번진의 할거 국면을 용인할 수 밖에 없었다. 

번진의 할거와 동시에 당 조정 내부에 출현한 정치세력은 환관세력이다. 이들은 현종 후기 3000명 가까운 세력을 자랑했다.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 세력은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무장들 역시 신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중앙 금군인 신책군의 통수권을 환관에게 주고 환관을 감군사로 임명해 지방 절도사를 감시토록 하였다. 군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환관은 환관전권의 국면을 열었다. 환관들은 대권을 장악하여 황제의 존폐와 생사 여탈권을 쥐고 나라를 흔들었다. 820년 헌종이 환관에게 피살된 후 당왕조의 여덟 황제 중 경종 만 태자로서 계위하고 나머지는 모두 환관에 의해 옹립되었다. 이렇게 당 후기 황제는 환관의 손에 놀아나는 형국이었고, 환관의 득세와 전횡으로 당 제국은 천천히 그 빛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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