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당 고종과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 측천무후는 당나라 대에 등장한다. 그녀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있다가. 태종이 죽자 감업사의 비구니로 출가한다. 당시 법도로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했다. 그러나 그를 눈여겨 보던 고종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그후 후궁의 자격으로 고종의 장남 이홍을 출산하였다. 이 출산으로 그는 후궁에서 비로 승격된다.
고종의 황후이던 왕씨는 654년 측천무후의 딸이 죽은 사건을 계기로 폐서인 되고 측천무후는 고종의 황후가 된다. 이때가 영휘 6년 655년 10월 13일이었다.
그녀는 황후로서 35년간 조정을 장악하였고 중국 고래의 이상 국가인 서주를 본따 주를 건립하여서 당 왕조를 중절시켰다. 그녀가 황제로 등극한것은 그녀만의 탁월한 능력이 있지만 여성의 권한이 강한 당왕조의 분위기도 한몫하였다. 그녀는 서위 시대 이래로 강고하게 중앙정치를 주도하던 관롱집단을 정계에서 몰아낼 정도로 비상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앞서 고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현명함을 두려워한 측천 무후는 황태자가 된 자신의 아들들을 독살한 후 사이의 세번째 아들 이현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고 어머니에 말에 순종하는 아들이었다. 이후 고종이 683년 사망하자 이현이 황위에 올라 중종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안되어 측천무후의 손에 폐위 되었고, 자신의 막내아들을 다시 황휘에 올려 예종이 되었다. 그때부터 측천무후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관장했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에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군사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곧 진압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또한 당 고조 이연의 11남 한왕 이원가의 반발 역시도 진압하여 무마되었다.
690년 측천무후는 결국 국호를 주로 고치고 1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측천무후가 무씨이므로 무씨왕조, 무주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15년간의 통치 이후 황태자 자리를 어떻게 할지 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조카 무승사나 무삼사를 황태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대관들의 반대로 다시 유폐되어있던 여릉왕 이현을 태자에 봉했다. 705년 병에 걸린 측천무후는 장간지의 요청으로 당 황조의 복원을 허락하였고 15년 만에 당황조가 복원되었따.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705년 음력 11월 2일 반세기 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측천무후는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당황조는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녀는 무주의 황제가 아닌 당나라의 태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았다. 황제 신분으로 올린 존호는 자씨월고금륜성신황제(慈氏越古金輪聖神皇帝)이며, 후에 개칭하여 천책금륜성신황제(天冊金輪聖神皇帝)로 존호를 고쳤으며, 태상황 신분으로 받은 존호는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이다. 사후에 당나라 황후로 신분이 복원되어 시호를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올렸으며, 후에 천후(天后), 대성천후(大聖天后), 천후성제(天后聖帝) 등으로 개칭 하였고, 최종적으로 올린 정식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
측천무후의 시대는 내치도 비교적 안정되어 통치 50년간 대규모 농민반란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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