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청대 백련교도의 난, 백련교 반란
백련교는 남송 시대에 창설된 백련종에서 기원한 불교 종파이다. 여기에 미래세상에 대한 미륵신앙이 함께 결합하면서 청 정부에 대한 반체제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다. 여기에 마니교의 평등주의와 금욕주의가 함께 더해지면서 종말론적 메시아 신앙을 가진 백련교가 탄생하였다. 이러한 백련교는 명대에 민중반란의 주류를 이루었으나 청이 대륙을 정복하고 치세를 이루는 동안에는 민간에 숨어들어 세를 넓히고 있었다. 이후 사회가 혼란해지자 민간에 잠복하고 있던 백련교는 수면위로 올라와 반란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경 연간의 백련교 반란은 섬서성 남부, 사천성 동북부, 호북성 서부의 산악지역과 하남성, 감숙성의 산악지대에서 발생하였다. 주로 산악지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이점에는 이유가 있었다. 청대 중기 이후에 빈민과 실업자, 범죄자들이 산악지역으로 몰려들어서 이 지역의 행정과 치안상의 문제가 많았다. 더욱이 이런 지역은 경제적 여건이 열악하여 주민들은 화전에 의탁하여 옥수수를 재배해 사실상 주식으로 삼아 살아갈 정도였다. 이러한 화전은 4~5년이 지나면 지력이 떨어지고 토양이 비에 쓸려나가 주민들은 다시 새로운 땅을 찾아서 떠나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그래서 산지의 주민들은 계속해서 유랑하거나, 농한기에는 평지로 내려가 품을 파는등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러한 생활형편은 산악지대의 주민들에게 기성질서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끔하였고 백련교는 이러한 불만에 방아쇠를 당긴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백련교가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건륭제 후반기였다. 백련교 지도자 유지협은 건륭 40년(1715) 백련교도들을 이끌고 청 정부의 탄압을 피해서 호북으로 잠입하였다. 이곳에서 다시금 교도들을 확보하고 민간에 뿌리내렸다. 이러한 움직임을 확보한 청 정부는 1794년 호북, 사천, 하남, 섬서에서 교도들을 처형하고 체포하였다. 이러한 청 정부에 반발해 백련교도들은 종말이 다가온 징조라며 재난을 벗어나기위해 반란을 일으켜야한다고 선동했다. 그리하여 1796년 정월 호북성에서 백련교의 반란이 일어났고, 섬서와 사천에서도 봉기에 가담했다. 호북성의 백련교도들은 청 정부가 묘족 반란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호북에서 세력을 급속히 확산시켰고, 사천과 섬서 감숙등을 떠돌면서 청 정부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펼쳤다. 그러나 가경 4년인 1799년에 건륭제가 사망하고 가경제가 액륵등보와 덕릉태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작전을 전개하였다. 청 정부군은 견벽청야 작전을 개시하여 백련교도들의 식량조달과 병력보충을 차단시키고 백련교의 근거지인 삼성교계지역에 현지인 출신으로 향용을 조직하여 백련교군 소탕에 열을 올렸다. 반격 당한 백련교군은 기아와 질병, 부상에 시달리며 패배를 거듭하다가 1805년에 완전히 궤멸당했다.
백련교는 동향이라는 지연의식, 혈연관계, 학업으로 연결된 사제관계를 중심으로 합쳐진 다수의 개별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직구조는 교도의 역량을 한곳으로 모으지 못하는 구조였고, 결국 이들은 각지를 전전하며 약탈하는데에 만족할 뿐 통일된 조직이나 공동의 목표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청 정부군에 완전히 궤멸당했다. 그러나 백련교의 반란은 청조의 군사적 무능력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청조의 군비를 완전히 소모시키는 역할을 하여 청말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기재로 작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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