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중국사] - 영국과 청나라의 전쟁, 아편전쟁의 발발, 중영전쟁

TimeMap Project

by 에이구몬 2021. 4. 16. 23:24

본문

반응형

[중국사] - 영국과 청나라의 전쟁, 아편전쟁의 발발, 중영전쟁

19세기 들어와 청왕조와 중국 사회는 안정과 번영의 시기를 지나 이전과는 다른 쇠퇴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장기적인 평화에 따라 늘어난 인구는 19세기에 세계인구의 1/4를 차지하는 4억 5000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를 지탱해야할 사회 시스템은 이미 너무 낡아버린 청조의 것이었고, 물적 기반 역시도 미약했다. 4억에 이르는 인구를 부양할 자원의 개발이나 생산성 향상, 기술 발전은 인구의 증가속도보다 더뎠고, 이는 사회적 불균형과 위기를 부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민중의 반란이 뒤따랐고 인구의 증가압력을 버티지 못한 생태계도 붕괴하여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는 청조의 능력은 미약했다. 그리고 이시기는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 열강이 무역과 군사력을 앞세워 동양으로 진출하는 이른바 서세동점의 시대였다. 동아시아에서 오래전부터 형성되어있던 조공무역에 이들은 끼어들어 무역을 시작헀는데 특히 영국은 18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 무역의 강자로 등장했다. 영국은 차와 도자기 비단, 면직물을 수입하였다. 대신 모직물과 면화등 자국 생산품을 팔려했다.

문제는 이 품목에서 발생하였다. 영국이 수입하는 품목은 매우 비싼 고가품이지만 영국에서는 날로 인기가 높아졌다. 특히 차는 귀족들의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수출되는 모직물, 면화등은 중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 수입과 수출의 불균형은 당시 화폐로 쓰이던 은이 모두 중국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영국은 만성적인 은 부족에 시달렸고, 전세계 식민지 경영으로 긁어모은 은은 중국에 차 대금을 지불하는데 모두 쓰이게 되었다. 은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 루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균형 거래에 영국은 매우 큰 불만을 품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십만kg 단위의 은을 적자로 기록했고, 19세기 초반엔 거의 백만kg의 은을 적자로 기록해야 했다.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였다. 

청 황제는 여러차례 명을 내려 아편의 수입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1780년 무렵 약 1000상자에 달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 1만상자, 1차 아편전쟁 직전인 1840년 직전에는 4만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아편 밀수의 증대로 수백만의 중독자가 생겨났으며 아편 구입의 대가로 지불된 백은이 해외로 대량 유출 되었다. 당시 백은은 납세의 단위인 기본 화폐이기도 했는데 은냥과 제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던 중국의 화폐, 금융, 재정체제는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아편을 폐기하는 임칙서

청조는 어쩔수 없이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아편에 대해 대응책을 낼 수 밖에 없었다. 1838년 말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광주에 파견하였다. 임칙서는 이곳에서 아편을 몰수하고 모두 바다에 회를 섞어 버리게 하였다. 거기에 수입금지라는 강경책까지 취하자 영국은 이를 빌미로 청나라에 파병을 결정한다. 영국과 전쟁을 시작한 청은 민중을 기반으로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해군력의 차이로 연안 도시를 공격하는 영국해군을 이기지 못했다. 청조는 결국 남경조약을 체결하고 영국과 타협하는 방안을 택했다. 1842년 체결된 남경조약으로 청은 광주 등 5개의 항구를 개항하게 된다. 이 남경조약은 중국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으며 동아시아에 지워지는 불평등 조약체제의 효시이기도 했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