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장 경제사회의 형성과정
율령제 = 장원 틀의 붕괴 이후
1장의 내용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사회변동은 내부로부터는 거의 발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그렇게 불안정한 사회에서 경제사회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정은 오히려 강력한 정치지배와 경제적 지배(부의 소유)와 결합을 저지함으로써 조건으로서는 경제사회의 형성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만약 일본에서 성속(聖俗) 양 세계에 걸쳐 혹은 정치와 경제에 걸쳐 권력이 집중되었다면 사회의 틀은 매우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율령제가 성립한 시기를 제외한다면 고대국가적 틀은 강고하지 못했으며 언제가는 내부붕괴 될 운명이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는 붕괴이후 무엇이 대신하는가다. 대부분의 아시아지역은 고대국가 붕괴이후 이를 대신할 사회의 특과 가치체계를 생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구에 의해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서구세력이 도래하기전 하나의 가치체계에 기초한 ‘나라(國)’를 만들어 식민지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다. ‘나라’는 경제사회의 형성을 토대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서구 산업혁명의 기술적 성과를 이식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시각은 저자가 일본이 공업화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시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사회의 성립과 이를 토대로한 새로운 지배체계의 성립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국제 환경
일본은 거대한 변혁의 시기에 대외 관계에서 긴장의 시기를 경험하였다. 대외관계에서 일시적으로는 적극적인 진출의사를 표시하였으나, 기독교도와 유럽세력의 제 1차 동양 진출에 직면하여 결과적으로는 쇄국이라는 거부적인 대응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국내 및 유럽 내부의 여러 세력들 간의 각축이 뒤얽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미묘한 반응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와 국내의 역사적 전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은 거의 미개척 분야에 가깝지만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일본에서 경제사회의 성립
결론부터 말하자면, 경제사회의 형성은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기나이(畿內) 평야지대에서 개시되어 17세기 중반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동안 일본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인 면에서도 지역차를 겪게된다. 이 둘의 조합에 의해 이 시기의 지역구조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장원연공의 변화
복잡한 지역구조의 결과가 경제사회의 형성으로 이어지게 된 최초의 변화는 장원제 내부에서 발생했다. 장원연공의 대전납화(=금납화)가 그것이다. 이는 이미 가마쿠라 말기에 보인 현상이지만 본격화는 14세기 후반~ 15세기였다. 원래 생산물이던 연공이 화폐로 변한 이유는 연공 운송이 무척 곤란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자운송에 필요한 율령정부의 행정력이 저하되었고, 무가세력의 장원침략에 의해 장원영주는 연공 획득에 필요한 조건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연공량도 감소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장원영주들이 지방으로 도망가거나 생활 수준을 낮추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남은 수단은 운송이 용이한 형태인 화폐로 연공을 취하는 것이었다.
화폐의 충족
그러나 연공을 화폐로 대신하는 데도 많은 장애가 있었다. 먼저 화폐나 귀금속의 충분한 저장이 없었다. 게다가 일반 농민은 화폐유통의 바깥에 놓여있었다. 화폐를 재화로 교환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장원연공의 대전납화는 결코 일순간 발생한 것이 아니다.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완만히 진행되었다.
첫번째 문제는 어떻게 화폐가 준비되었는가다. 주조화폐와 계량화폐가 유통되고는 있었지만 크게 부족하였다. 이에 대량의 외국화폐가 유통되었다. 송전과 명전이 왜구나 견명선 무역을 통해 유입되었다. 대규모 무역의 개시는 정치적으로는 무역특권 쟁탈전을 야기시켰고 경제적으로는 무역상인층과 무역항, 무역도시등의 설립을 촉진시켰다.
두번째 문제는 농민이 어떻게 화폐를 획득하는가이다. 아마도 화폐를 갖고 있던 상인들이 영주에 대한 연공 수납을 대행했을 겻이다. 농민은 생산물로 납품하고 상인은 수중에 있던 화폐로 연공을 냈을 것이다. 상인은 소유한 생산물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장의 발흥
시장의 발흥은 시장을 통해 필수품을 충족시킨다는 문제로 이어진다. 도시에 거주하는 영주층이 화폐로 연공을 취했을때 영주는 화폐를 내고 생필품을 구입하게 된다. 즉 시장을 통해 충족하게 된다. 도시는 이미 자족체집단이 아닌 화폐를 지출해 필수품을 구입하는 경제적 기능을 담당하는 인구집단으로 변하고 있었다. 우선 도시 주변부의 농촌이 영향을 받았다. 이들 지역에서는 농민이 화폐유통에 편입되어 스스로 연공을 화폐로 납부하게 되었다. 농민은 판매를 위해 생산을 하게 되며, 생산목적에 연공과 자급뿐아니라 판매도 추가되어 생산에 대한 관계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처럼 대전납화는 큰 충격을 사회 각층에 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1세기나 2세기 정도의 시간에 걸쳐 서서히 발생했다. 또 대전납화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도시가 탄생하고 있었다. 교토의 주민들에는 장원영주와 그 기생계급 외에 상인과 수공업자층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 마치슈의 형성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농촌 · 농업생산의 변화
이 시기에 이르면 화폐유통과 판매를 위한 생산이 도시 주변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생산 목적에 판매라는 요소가 추가됨으로써 생산을 억압하던 조건이 완화되었다. 농민은 어떻게든 생산량을 증대시키고, 잉여분을 판매해 화폐를 얻으려했다.
생산량의 증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선 경지면적의 확대이다. 그러나 기나이 부근의 평야는 일찍부터 경지화가 진행되었기에 즉시 한계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다음은 일정 경지면적에서의 생산량 증대이다. 이는 토지생산성의 증대와 토지이용의 고도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예속 노동력 사역에 의한 종래의 생산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농업의 경우 한계에 달했다. 여기서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한 해결책으로 농장경영을 예속 노동력에서 경영주의 가족 노동력으로 대체하는 가족경영이 대두되었다. 아마 이러한 시도도 오랜 기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소농자립
이러한 과정을 소농자립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 동기나 경과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이 없다. 어떤 저자는 이를 정책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다른 어떤이는 자립한 소농이 쟁취했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이 두설에는 모두 약간의 문제가 있다.
실제로 소농자립의 과정에는 상당히 많은 의문점이 남아있다 저자도 명확한 해답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최소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 변화 역시 오랜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아마 토지보유가 없는 자립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립한 소농민이 토지를 보유하는 것까지 배제할 수는 없다.
소농경영 성립의 영향
이러한 과정을 거쳐 소농자립은 농촌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교토와 나라 도시 주변부로부터 시작되어 16세기에는 기나이 평야지대로 널리 확신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매우 다양한 국면에서 나타났다. 우선 농업기술의 발전 방향은 경지면적당 수확량의 증대였다. 이미 에도시대에 경지면적당 수확량은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둘째로 예속에서 해방되었기에 결혼율과 출산율이 상승했다. 그 결과 인구증대가 발생했다.
세 번째, 소농경영의 일반화에 따라 농민 상호간의 횡적 연계가 긴밀해지게 되었다. 이에따라 경영주로서의 농민은 ㄱ오통된 이해를 갖고 소, 고, 지계라고 하는 지연 공동체가 조직되었다. 농민은 바야흐로 스스로의 규약에 의해 서로 책임과 의무 그리고 권리를 분담하는 자치조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경제 인센티브의 도입
소농경영으로의 이행은 농민의 생산목적 변화에 수반한 것이었다. 판매를 위한 생산이 새로운 목적으로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민은 스스로 경영을 책임지는 존재가 되었다. 이는 농민이 경제적 기회를 잘 잡기만 한다면 화폐라는 형태로 수입을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농민 생활에 경제적 인센티브가 주어진 것은 농민의 일상 행동과 의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생산에 대한 사고방식도 크게 변화했다. 지금까지의 노동은 고역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보다 나은 삶을 주는 일종의 덕으로 바뀐 것이다. 육체적 고통은 견딜 수 있는 것이 되었고 가족노동은 이러한 노동에 가장 적당한 것이었다.
일본인은 근면하다고 한다. 이것을 국민성으로까지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국민성이란 초역사적 자연적 체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에도 이전의 시대에서는 근로가 덕이라는 사고방식이나 사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에도 시대가 되면 근로가 미덕으로 여겨지게 된다. 일본의 경우 가족제도라는 채널을 통해 근로는 하나의 도덕으로서 자자손손 전해지게 되었다. 현재의 일본인에 대한 평가중 하나인 근면은 이 시기에 그 원형이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도시의 변화
농촌의 변화와 함께 도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교토와 나라라는 옛도시는 기능적으로 변질되고, 사카이나 효고처럼 본래 그 주민의 경제활동이 존립조건이 되는 새로운 유형의 도시가 출현했다. 판매를 위한 생산이 침투하면서 수로와 도로가 편리한 곳에 물자가 집산되고 상인과 수공업자가 거주하는 시장촌이 연쇄 반응적으로 성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단순화 시켜선 안된다. 오닌의 난 이후에 기나이는 종종 변란으로 황폐해졌고 그 중심이 되는 교토의 쇠퇴도 정도가 심했다. 기나이를 조금만 벗어나면 도시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발달하지 않았으며 농촌의 생산기술과 조직은 그대로였다. 이 시기의 경제적인 지역차는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나이 평야부에서는 판매를 위한 생산이 전개되고 화폐가 유통되었으며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행동하고, 경제적 가치를 그 원리로 삼게 되었다. 또한 자치조직을 갖는 사람들의 집단이 형성되어 몇개 도시는 자치도시로서 유명해졌다. 이 자지도시들은 통일정권이 성립하자 저항하는 일 없이 그 통치 하에 편입되었다.
전국 다이묘
기나이에서는 경제적 변화는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변화가 없었다. 기나이는 장원영주에게도, 아시카가 막부에게도 최후의 거점이었고 장원제 최후의 잔존지역 이었다.
한편, 변경지방에서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율령제와 장원제의 지배가 없어지고 일종의 무질서 상태가 되었지만, 그 내부로부터 재지영주층이 세력 각축을 통해 하나의 지방권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세력을 전국 다이묘라고 부른다.
전국 다이묘들은 세대를 거치며 수개국에 걸쳐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진보한 기나이 지방과는 관계없는 변경지대에 기반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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