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중세 농업 · 재정과 그 변동
중세경제의 탐구방법
경제생활을 규정하는 중대한 요소로서 자연환경, 인구, 자원, 기술, 시장을 포함한 제도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각각 기본요소의 변화도 생태계와 그 속의 인간 삶에 영향을 미쳤다. 기후, 토양등의 자연환경은 경제생활, 특히 농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그러나 한반도의 자연조건은 농경에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산지가 국토의 7할을 차지하고, 국토의 7할이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의 풍화토여서 토양이 척박하였다. 또 강우량의 편차가 심하여 홍수와 가뭄이 빈발하였다.
전근대에는 기술 수준이 낮아 식량의 확보를 위해서는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농업에 종사해야했다. 조선은 집약적인 소농경영을 발달시켰으나 도시화율이 낮아 직업분화가 진전하지 못한 특성을 가졌었다. 이처럼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 농업이 개인의 경제생활과 전반적인 경제동향을 좌우하여,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통해 계급적 이해가 형성되었고, 농업잉여의 재분배를 통해 지배기구가 유지되었다.
기근이 일상적인 전근대에 대부분 사람에게는 생존이 우선적 과제였다. 부양능력을 초과하는 인구의 증가는 멜서스 법칙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인류는 멜서스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근대적 기술과 시장망의 확립을 기다려야했다. 시장은 농업경영의 존립을 위한 기본요소이고 농업경영방식, 농업기술진보등에 영향을 미친다.
농업기술의 발전
농경시대 가장 획기적 기술진보인 철제 농기구는 4~6세기에 보급되었다. 이를 계기로 휴한을 하면서도 토지를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농법이 성립되었다. 통일신라기에는 철제 농기구와 우경의 확산이, 고려시대에는 연작상경법의 보급이, 조선시대에는 이앙법의 보급이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킨 주요 기술진보였다. 또한 조선전기 면작의 보급으로 농가경영에 안정화가 이루어졌다. 1364년 문익점에 의해 전래된 면화는 섬유제품으로서의 우수성과 국가 장려책에 의해 널리 재배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전반에 의료품만 아니라 물품 화폐의 주종도 삼베로부터 무명으로 바뀌었다. 무명은 삼베에 비해 내구력, 보온성등이 우수할 뿐아니라 제조시간을 절감할 수 있어 의복생활을 발전시키고 가내수공업을 활성화시켰다.
조선전기 국가의 농업장려책과 사대부층의 노력은 독자적 농서를 출현시켰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농서가 수입되었지만 조선에 적용시키기에는 풍토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의 명으로 간행된 농사직설은 중국의 농서를 참조하고 각지로부터 실행하는 농법을 조사하여 조선의 농업기술을 체계화 한 것이었다. 농사직설에는 벼의 재배법으로 수경법, 건경법, 삽종법등을 들었다. 그 중 삽종법은 모판에서 기른 모를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이다. 이앙법은 노동력을 절감하면서도 수확량을 증진시키는 획기적인 농법이었다. 농민들은 이앙법을 통해 김매기 노동을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앙법은 물을 항상 필요로 했기에 가뭄에 취약했다. 가뭄에 취약한 이앙법의 보급을 위해서는 수리시설이 정비되어야했다. 태종대부터 세조대까지는 제언을 활용한 수리개발이 활발하였다. 제언의 개발이 한계에 달하자 보의 보급이 확산되었다. 17세기에는 가뭄에 대비하여 물을 담지 않은 모판에 모를 키우다가 수량이 풍부해지면 이앙을 하는 건앙법이 개발되어, 수리가 불안전한 지역에 보급되었다.
조선후기 밭농사에서는 시비법과 쟁기 기술의 진전에 힘입어 북부에서는 연작법의 불안정성이 극복되었고, 남부에서는 2년 3모작이 정착하였다. 조, 보리나 밀, 콩 또는 팥, 겨울 휴한의 순서로 진행되는 2년 3모작은 쟁기와 같은 기술이 발달되어서야 정착되었다. 이처럼 논과 밭의 토지생산성의 증가를 위해 시비법의 발전도 뒷바침되었다.
인구 변동과 생활수준
유럽중세사연구에 의하면 식량생산이 인구를 충분히 부양할 수 있는 시기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가 팽창하다가 인구가 과다해지면 생활 수준의 하락으로 기근과 질병이 빈발하여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가 수축하였다. 313년까지 존속한 낙랑군 전성기의 인구는 40만명이다. 6세기 후반에 고구려는 인구 100만에 이르렀고, 백제와 신라는 각각 인구 50만에서 100만명으로 추정된다. 12세기 고려의 인구를 300만명 내외로 추계한 연구도 있었다. 고려시대에 자연재해등으로 묵은 토지인 진전의 개간과 신전의 개발로 보건대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였던 것은 확실하다. 고려는 진전의 개간을 소유권의 부여, 토지세나 지대의 감면이라는 조치를 통해 장려하였다. 고려 말 이후 개간은 수령의 임무로 명시되었다. 12세기 이후 저지대의 개간은 연작상경법의 보급과 더불어 한국 중세에서 인구 증가를 낳은 주요한 요인이었다.
15세기에는 인구의 증가가 현저하였다. 첫번째 이유로는 여말선초에 연작상경법이 널리 보급되어 인구 부양력을 결정적으로 높였다. 둘째 고려말 창궐하던 왜구 때문에 바닷가는 경작하지 못했는데, 왜구가 종식되고 개간정책도 실효를 거두어 개간한 땅이 날로 불어서 1406년에는 남아있는 땅이 없을 정도였고, 후진지역이던 북부에서도 개간인 진전되었다. 셋째로 고려말 이후 토산약재를 활용하는 향약의술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달하였다. 향약구급방을 효시로 하여 관련의서가 출판되었다. 넷째로 조선의 농업장려책과 기근대책이 인구증가 추세를 보강하였을것이다. 이러한 제도에는 조선의 환곡제도와 진휼제도가 있었다. 조선은 호구의 철저한 파악을 지향하였으나 사대부와 토호의 반발로 쉽지 않았다. 세조대에 처음으로 파악이 이루어졌는데 1466년 100만호를 넘었다. 당시 호당 인구수를 5명으로 추정한다. 한국 최초로 근대적인 인구조사는 1925년 이루어졌다. 이 국세조사에 의하면 조선인이 1,902만명이었는데 이를 출발점으로 역산하면 15세기 후반 인구수는 700만명을 넘었다.
16세기 삼남지방에서 이앙법이 보급되고 개간지가 증가됨에 따라 인구는 증가하는 추세였지만 15세기에 비해 증가속도는 둔화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이유로는 첫째, 개간의 진전으로 경지의 외연적 확대가 힘들어졌다. 둘째, 16세기 인구는 1,000만명을 돌파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의 경제력으로 이만한 인구를 부양하기엔 버거웠을 것이다. 셋째, 왕조의 기강이 해이해져 중간 수탈이 확대된 반면 기근대책이 소홀해진 것도 농민의 삶과 인구동향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조선은 인구의 격감과 경지의 황폐화를 겪었다. 임란전 150만결이던 국가에 파악 경작지는 임란직후인 1601년에는 30만결로 줄어든다. 임란 직후부터 개간이 활발히 진전되었고 17세기 후반에는 인구를 임란전의 수준으로 회복하였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개간장려책을 펼쳐 개간을 장려하였다.
인구밀도의 측면에서 이야기하면 조선의 인구밀도는 1㎢당 70명을 넘었고 1인당 경지면적은 700~800평 정도였다. 이는 중국의 선진지대 및 일본과 더불어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고 1인당 경지면적이 가장 좁은 지역이었다. 논농사에 의존하는 동아시아는 밭농사에 의존하는 서유럽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았다. 18세기 조선의 인구밀도가 높았던 데에는 조세 부담률이 낮고 환곡등을 통한 기근 대책이 정비되어 있었고 산림자원에 대한 접근이 자유로운 편이어서, 다른 전근대 국가에 비해 한계상태 인구의 생존율이 높았던 점도 작용하였다. 추계상이긴 하지만 1392년 인구를 500만으로 보고, 그리고 1910년의 인구를 1,700만으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조선시대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0.24%였다. 또한 경지생산성이 2.5배 정도 증가하였다면 경지도 늘었으니 곡물 생산은 3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경제규모는 3배 정도 늘고 경제 성장률은 0.2%정도로 볼수 있다. 전기간에 걸쳐서 그다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인구성장률과 경제 성장률은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 평균보다 낮지는 않았다.
토지소유의 진전
전근대의 농업경영에서 토지와 노동력은 어떠한 방식으로 결합되었던가. 그것은 토지의 소유방식과 노동력의 예속상태에 관련되어있다. 경지가 남아돌고 화전식 농법처럼 토지를 부정기적으로 이용하는 단계에서는 토지의 용익권이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인구가 증가하여 경지가 희소한 자원이 되고 농법의 진전에 따라 토지를 정기적으로 이용하게 된 휴한농법의 단계에 이르러 소유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소유권은 어떻게 장악되었을까. 근대 민법은 배타적인 소유권을 상정하지만, 전근대에는 복수의 권리가 중첩된 중층적 토지소유가 널리 나타나고 이었다. 나카무라 사토루는 전근대의 토지소유를 자기의 노동에 기초한 소유와 타인 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소유의 중층적 결합관계로 파악하였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기적으로 경작하면 사실상 소유권이 성립한다. 그런데 전근대에는 지배계급이 상급소유권을 행사하여 잉여를 수취한다. 중세 서유럽에서는 영주, 전근대 아시아에서는 국가이다. 그에 반해 로마 공화정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용익하는 토지에 대해 국가의 자의적 침탈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는 절대적 소유라는 관념을 고안하였다. 여기서 근대적 소유관념이 나왔다. 중국과 조선에서는 로마와 같은 관념이 성립할 수 없었고, 국왕이 토지에 대한 관할권을 가진다는 왕토사상이 존재하였다. 왕토사상은 중세국가에서 널리 보인다.
우리나라 토지소유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원시공동체의 공동소유가 사라진 후 읍락공동체에서는 군장이나 호민의 사람과 토지에 대한 지배력이 강고하였으므로 농민의 토지소유는 성립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읍락이 해체되어 가고 군장층이나 호민층을 국가의 지배층으로 편입하면서 신라시대에는 식읍이나 녹읍같은 영역지배권을 부여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왕토사상의 관념아래 토지사유가 성립하였다. 당시 토지소유권을 증명하는 지권이 작성되었다. 그런데 소유권은 국가적 토지 지배력의 강한 제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의 사례를 보면 토지의 매매와 양도를 서술하면서 왕토임을 환기하였고, 사원에 토지를 희사하는 행위는 금지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수조권적 지배가 강하게 관철되는 가운데 민간의 소유가 성장하였다. 그것은 진전에 대한 권리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고려초에는 토지를 묵히면 소유권을 보장받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에 기초한 소유가 취약하였지만, 고려후기에는 토지사유가 성장하여 진전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1022년 민전이라는 용어가 나타난 것은 사유의 성장을 반영한다. 그 후 무신집권기와 원간섭기를 거치는 동안 전시과제도는 문란해져서, 수조지는 매매되기도 하였다. 또한 하나의 토지에 대해 여러명의 전주가 수조권을 행사하기도하고 수조권을 소유권으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이는 수조권을 가진 사전주의 토지지배력이 조세 징수 차원을 넘어 토지 처분에 대한 권리를 내포하였던데에 기인한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수조권제도의 문란이 고려의 멸망을 낳았다고 판단하여 1391년 과전법을 공포하여 경기지방에 한해 사전을 분급하였다. 여기서 고려시대에 허용된 소유지의 매매 및 양도가 금지되어 토지소유의 관념적 가치가 부정되었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모든 토지가 왕토이고 공전이 이상적이라는 관념에 입각하여 국가의 토지관할권을 강화하여 평등한 농경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1466년에는 직전법을 시행하여 현직관리에게만 수조지를 주었고, 1478년 이후에는 관에서 직전의 전조를 거두어 지급하게 되었다. 1556년에는 직전법마저 폐지되어, 관리는 오직 녹봉만을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와 달리 토지의 매매는 수조권의 제약이 없이 활성화 되어 경작 소유권이 성장하였고, 국가의 수조권에 대한 일원적 지배력의 확립 또한 경지 소유권의 강화를 낳았다. 또한 속대전에 나타난 것처럼 황무지에 대해 개간하여 경작하는 자를 소유주로 삼는다는 조항등을 통해 경지소유권이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항 전에 경지소유권이 국가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관념은 성립하지 않았으나 사실상 국가의 절대적 보호를 받았다.
조선시대 경지소유권의 성장을 낳은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는 법치주의 통치이다. 조선왕조는 고려의 법제도를 계승하였다. 유학이 법치주의 이념을 제공하여 민생의 안정과 편의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법제도가 개선되었다. 둘째로 상속 문화가 있다. 조선시대의 상속은 부모가 소유주체로서 단독 소유하는 재산을 승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속문화가 사적소유를 진전시켰다. 사적소유의 진전은 경제발전을 위한 중요 조건이다. 사적 소유의 진전은 토지의 효율적 이용을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인데, 조선시대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이에 크게 힘입었을것이다. 토지시장의 성장은 역으로 토지소유를 한층 굳건한 기반위에 올려 놓았다.
고려시대에는 산지인 시지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산지에 대한 공동 이용 정책을 끝까지 견지하고자했다. 거름, 목재등을 조달하는 산지에 대한 이용이 증가하며 인구의 증가에 수반하여 산림의 희소성도 점점 커졌다. 이로인해 공유지의 비극이 초래되었다. 석탄이라는 화석연료 없이 고인구밀도의 조선사회가 제도만으로 산림 황폐화를 근본적으로 막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산림정책은 조선 전기에는 민생의 안정에 도움을 주었으나, 인구가 많아진 18세기 이후에는 산림의 황폐화라는 공유지의 비극을 재촉하였다.
노비제의 변화와 임노동층의 형성
생산력으로 남의 노동력을 지배하여 잉여를 수취할 수 있게 된 이후 계급사회가 성립하였다. 시대를 거슬러 갈수록 인구밀도가 낮아서 토지보다 노동력이 더욱 희소한 생산요소였다. 인구가 늘어날수록 토지가 희소해져 토지의 가치는 높아지는 추세였다. 그래서 조선초에 양반은 토지보다 노비를 중요한 자산으로 간주하였는데, 조선후기에 들어가면 사정이 변하였다. 전근대에는 지배층이 희소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력을 예속 상태에 묶어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동력을 예속 상태에 두려면 그들을 먹여 살려야하고 도망갈 수 없게끔 하는 관리비용이 들었다. 따라서 노동력을 원활히 확보 할 수 있다면 예속상태로 두는 것이 불리할 수도 있었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 까지 노동력의 예속성이 점차 완화되는 추세였던 것은 인구증가에 수반하여 노동력 확보의 어려움이 줄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3세기경 성읍국가 단계에서 지배층인 호민층이 민 또는 하호를 종처럼 사역하고 순장을 널리 행하던 것으로 보건대, 이후의 시기보다 노동력의 예속상태가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읍국가체제를 극복하면서 형성된 집권국가는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집권국가는 재정과 군대의 기반으로서 공민인 양인의 확대를 추구했지만 중간지배층은 가내와 농장의 노동에 사용할 예속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중간지배층의 이러한 욕구는 국가의 양인 보존책과 갈등관계에 놓여있었다. 대체로 국가가 집권력을 강화하는 국면에는 양인의 확대책을 추진하였고, 집권력이 약화되는 국면에는 중간지배층이 양인을 천민으로 전락시키기가 수월하였다.
고려후기의 혼란 가운데 귀족의 농장이 확대되고 양인의 불법적인 노비화로 노비가 증가하였다. 조선의 건국을 전후하여 사전을 혁파하고 양인이면서 노비로 전락한 자를 원상복구 하는 사업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5~16세기에 노비는 층가추세였다. 그리고 16~17세기에 노비인구가 가장 많을 때는 전인구의 30~40%로 그 수가 추정된다. 그래서 조선 중기 사회가 노예제라는 주장이 나왔으며 그것에 대해 노비가 농노에 해당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조선시대 노비는 매매와 양도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노예와 같은 존재였으나 재산을 소유하여 매매 및 양도를 할 수 있었고 소송등 법률적 행위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럽의 농노에 상응하는 신분으로 볼 수도 있다. 국가는 노비를 양인과 더불어 민의 범주에 포괄하여 생명을 보호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후기로 갈 수록 노비의 가족 구성이 안정되고 재산소유가 진전하였으며 국역을 부담하는 사노비가 늘어갔다.
조선전기에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가운데 노비의 비중이 증대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첫째, 고려와 달리 조선은 양인과 천민의 혼인이 조장되고 그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됨에 따라 노비 수가 급증하였다. 노비 소유자는 여자종에게는 다산을, 남자종에게는 양인여인과의 혼인을 장려하여 노비를 증식하였다. 태종은 양천간의 혼인을 금지하였으나, 사족층의 반대로 그 조치는 15세기 무렵 무력화 되었다. 둘째로, 고려보다도 국가의 집권력을 현저히 강화한 조선에서는 국가의 공민을 사적인 예속민으로 두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노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고 국가도 그것을 용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로 노비에게서 납공을 받는 납공노비라는 제도는 노비에게는 예속성 완화, 주인에게는 감독비용 절감이라는 차원에서 선호되었을 것이다. 넷째로 멜서스 시대에는 흉년이나 자연재해로 생존이 어려운 탓에 노비의 공급 원천이 풍부하였다. 조선전기에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여 생활 수준이 저하되어 갔다면 이는 곧 노비공급의 원천이 확대되는 셈이다. 16세기에는 증대한 공물, 진상의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다수의 양인이 유력층 휘하에 들어가 노비와 혼인하였다.
노비제는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18세기에 빠르게 쇠퇴하였다. 그 이유에는 첫째로 노비제가 국가의 재정과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인륜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확산하여 국가정책이 변한데에 있다. 현종대에 시행된 노비종모법은 노비를 감소시킨 주요 원인이었다. 1886년에는 노비신분의 세습제가 폐지되었고 1894년에는 사노비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둘째로는 경제적 요인이다. 인구의 증가와 농업경영의 변화로 토지에 대한 노동력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저하하여, 조선초와는 달리 노비보다 토지의 재산가치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농장의 직영지 비중이 감소하고 병작지주제가 성장하면서 노비 노동력을 확보해둘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동아시아의 쌀농사지대는 유럽의 밀농사지대보다 인구밀도가 높아 가축을 방목할 초지가 적기 때문에 목축업의 비중이 낮았다. 그 결과 노동력이 농번기에 집중투입되는 계절성이 강하였고, 장기 고용노동력의 시장이 확대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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