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겪은 전쟁 동원의 기억
전쟁은 필연적인 폭력의 집합체이다. 전쟁 중에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합리화된다. 적을 향한 폭력은 물론이고, 국가 내부를 향한 폭력마저도 용인된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과 북한은 전쟁이라는 목적을 위해 징집이라는 내부를 향한 폭력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이러한 폭력의 양상을 어김없이 보여주었다. 물론 징집의 행위 자체는 국가가 가진 정당한 권리라 말할 수 있다. 국가 존속을 위해 구성원의 일부를 징집해 군인으로 활용하고, 국방의 의무를 지게끔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적 관점에서의 의무와 권리가 균형을 이루었을때 성립하는 명제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인민군은 38선 이남의 대한민국 영토에서 인민군의 의용군을 모집했다. 이는 자국의 국민(인민)이 아닌 점령지에서의 징집이었기에 그들에 대한 권리보장이 없는 엄연한 폭력이라 규정할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이 인민군을 북으로 몰아내고 수복지에서 시행한 제 2국민병, 국민방위군 징집 역시 국가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국가가 징집된 국민에게 국방의 의무를 지우려면 국가 역시도 몇가지 의무를 가지게 된다. 국가는 전투행위 외적인 측면에서 징집된 국민의 생존을 보장해야 하며, 일정 수준의 임금을 지급해야한다. 물론 현재를 포함하여 이러한 국가의 의무가 지켜지기 어려운 것은 맞으나, 국가가 또는 사회 지도층이 이러한 국가적 의무를 포기하고 징집된 국민을 대하는 것은 국방의 의무를 가장한 폭력에 해당한다.
필자는 『그들의 새마을운동』에 소개된 마을들이 겪었던 국가가 징집이라는 형태로 행하는 전쟁폭력에 대해 살펴보고, 특히 북한이 남한출신의 인민의용군을 모집하는 특수한 상황에 집중하여 마을이 겪어온 전쟁동원의 기억을 따라가고자 한다.
인민의용군 모집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은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이 시작된지 겨우 사흘만에 서울을 함락당한다. 이어 7월 4일에는 경기도 수원이 함락당한다.[1] 뒤이어 수원과 지근거리에 있던 이천에도 인민군이 들어와 진주한다. 인민군은 점령지역에 정치공작대를 파견하고 그들의 활동을 독려했다.[2] 정치공작대는 점령지, 소위 해방지역에서 사회단체들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한민국 영토에 파견된 정치공작대는 북로당출신과 남로당 출신 간부들, 그리고 소련 고급당학교 출신이 적절히 조합된 형태였다. 그 중 경기도 당위원장 박광희는 소련고급당학교 출신으로 남로당 출신이었다. 북한은 남로당 출신 인사들이 대한민국의 사정을 잘 알고 주민들의 신뢰도 쉽게 얻으리라는 판단에 이러한 인사를 펼쳤다.[3]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파견된 정치공작대는 농촌인 면, 리를 대상으로도 인민위원회를 갖추어 궁극적으로는 노동당을 재건하는 목표를 세웠다. 당 및 사회단체 조직과 함께 북한은 대한민국 영토 점령지역에서 당의 정책을 집행 하는 행정기관으로서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즉, 인민군이 점령한 직후에는 예외 없이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개전 직후인 6월 26일 개성시 인민위원회를 필두로, 27일 황해도 연백군 임시인민위원회가, 28일에는 옹진군과 서울 시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경기도의 경우에는 7월 7일 시흥군 임시인민 위원회가 조직된 것으로 보아 6월 26일부터 7월 7일까지 도내 각 군의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4]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워 대한민국 영토내 점령지를 정치적으로 흡수하려 했던 북한에게는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인민군의 전략이 전차를 앞세운 2차대전 시기 독일식 전격전 양상을 띄우다 보니, 일선의 전투부대는 전투 외 다른 임무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이었다. 1949년 38선에서 국지도발을 감행하면서부터 만성적 인력부족에 시달리던 북한으로서는 점령지 치안유지와 노무, 전투부대 지원등을 도맡을 새로운 병력이 필요했다. 이에 북한은 1950년 7월 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전시동원령'을 선포하고 북한 전역과 대한민국 영토내 점령지에서 청년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북한군에 점령당한 아미리에서도 북한의 인민의용군 모집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새마을운동』의 구술 인터뷰에서 나타나듯, 아미리에서도 인민의용군 징집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징용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 기피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징집의 형태는 도시에서는 군중대회, 궐기대회를 통한 집단방식이 주로 사용되었고[5], 농촌에서는 마을단위로 징집대상이 되었다. 아미리의 경우 현재 부발읍에 위치한 부발국민학교에서 인민의용군 징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러 사례를 종합할때 의용군 징집에 있어서 인민위원회의 방침은 주로 자원형태이며 일제의 징용에 비해 약한 정도의 강제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인민위원회가 결정권은 갖고 있지만 의용군 모집에서 관권의 강제력으로 잡아가는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6] 아미리 주민 신종백씨의 질의응답에서 볼 수 있듯 인민의용군에 자원하지 않아도 별다른 처벌은 없었고, 자원한 사람들도 일부 탈영하여 돌아왔지만 인민위원회의 별다른 처벌 또한 나온 이야기가 없다. 이는 인민군이 군사적 점령을 한 지역이라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완전히 복속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주민들의 자원에 의한 인민의용군 모집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의용군의 모집이 쉽지 않았고, 일제의 징용보다 약했다고 해서 북한정권이 휘두른 징집이라는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적지않은 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인민의용대가 되었다. 민청은 7월 10일까지 서울시에서만 7만 8,000명의 민청원이 의용군 참가 를 자원했고, 학생들은 민주학련 주최로 7월 11일까지 417개소에서 궐 기대회를 개최하여 6,757명이 지원(남자대학생 2,182명, 남자중학생 2,244명, 여학생 2,331명)했다고 발표했다.[7] 10만에 가까운 서울 시민이 인민군을 위해 지원병이 되어 전선과 보급부대로 배치된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인민군에게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인민군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일부 포로심문조서의 내용과 이를 토대로 작성된 미국측 자료를 근거로 남한출신 의용군은 차별대우받았 다고 보고 있다.[8] 게다가 점령지출신의 의용군은 대부분 최전방인 낙동강전선에 배치되었다.[9]
아미리와 같이 경기도를 비롯한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징집된 인민의용군은 대부분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국군과의 전투에서 대부분 총알받이로 희생되었다.[10] 이는 북한이 대한민국 영토 내 점령지에서 행한 전쟁폭력 중 가장 잔인한 전쟁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남한의 장정들이 인민의용군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출처 ; 전쟁기념관]
인민의용군의 훈련 모습. 2∼10일간의 훈련을 받고 최전방인 낙동강 전선에 배치된 후 그곳에서 재편성되었다.
[사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왜관에서 미군에게 노획된 T-34/85 전차
[사진출처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 김선호,박동찬,양영조, 『경기도의 6.25』, 경기그레이트북스 24, 36p
[2] 북한은 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군사위원장 김일성 명의로 발표한 "우리 조국 수도 서울해방에 대하여"라는 방송 연설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결정 "해방지역에서의 당ㆍ정ㆍ사회단체의 재건과 토지개혁 및 인민군 원호 사업을 신속히 조직 진행할데 대하여"를 통해 점령지역에 정치공작대를 파견하고 그들의 활동을 독려했다.
[3] ⟪자유일보⟫, 「6.25 초기 북점령지마다 ‘인민위원회' 치밀한 조직」, 2018.04.24
[4] 김선호,박동찬,양영조, 『경기도의 6.25』, 경기그레이트북스 24, 173p
[5] “당국은 조직적인 모든 기관을 동원하여 애국적인 청년남녀는 모두 의용군 대열에 나서라고 외치고 있다. 마을에선 동민을 모아 보내고, 학교에선 학생들을 끌어 보내고 직장에선 종업원을 채찍질해 보내고, 그래도 부족함인지 가두에서 젊은 사람을 붙들어 보낸다 하여 큰 공황을 일으키고 있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110p
[6] 이용기, 「마을에서의 한국전쟁 경험과 그 기억」, 2001, 37p
[7] 배경식, 「민중의 전쟁인식과 인민의용군」, 2001, 75p
[8] 서용선외, 『한국전쟁시 점령정책 연구 - 점령정책, 노무운용, 동원』, 국방군사연구소, 43∼44p
[9] 배경식, 「민중의 전쟁인식과 인민의용군」, 2001, 79p
[10] 전방의 인민군 병력 중에서 남한출신 보충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 높았던 것 같다. 일률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포로신 문조서에 따르면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북한의 최정예부대였던 6사단의 경우 8월 말 현재 30%만이 전쟁발발 때의 현역병이고 나머지 70%는 남 과 북에서 보충된 병력이라고 했다. 『남북한관계사료집 24』, 77, 116-1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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