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의 성립과 그 특질
에도 시대 사회경제사의 새로운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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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에도 시대는 경제사회가 형성되고 확립되는 시대였다. 경제사회란 그 안에서 사람들이 경제행동을 취하는 사회이며 경제적 가치가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여러 경제법칙이 상호 동작하는 사회를 가르킨다. 경제행동이란 단순 생산과 소비가 아닌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고자하는 성향을 의식 또는 무의식중에 내재하는 행동이다. 물품의 판매자와 구매자가 수요, 공급 관계를 통해 거래를 하고, 가격이 결정되고, 그 가격에 대응해서 생산량이 결정되는 가격기구의 존재야말로 경제사회의 핵심이다.
인간은 다원적 가치를 지닌 존재이며 그 안에서 경제적 가치관이란 최소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획득하려는 행위에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경제법칙이 하나의 사회 틀 안에서 작동하기 위해선 사회 내부의 경제사회성격이 충실해야하고, 사회 구성원 대부분에게까지도 경제적 가치관이 침투해 경제적 행동이 일상화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법칙은 스스로의 작동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단지 다른 것에 대한 부수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경제사회의 성립은 결코 오래된 것이 아니다. 비교적 최근의 산물이며 그 성립에는 지역과 민족에 의해 시간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경제사회 성립의 지표는 사회를 구성하는 일부 계층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아닌 더 넓은 범위에서 일반 서민의 행동이 경제적인지의 여부이다. 예를 들어 고대 사회에서 엘리트층의 상업행위가 아무리 발달했다 하더라도 일반 서민과 관련이 없는 경우 경제사회의 성립이라고 볼 수 없다.
경제사 연구에서는 이런 경제사회가 특정 상황에서 언제 어떻게 성립했는지를 해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경제사회의 성립 시기와 내용은 그 국가 혹은 사회 나름의 공업화 형태와 특징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공업화라는 현상은 반드시 경제사회가 충분히 성숙된 후 성립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경제사회의 경험이 충분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다르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더욱이, 공업화 이전의 경제 사회의 경험은 사회 구성원들이 이미 경제행동을 경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그 나라의 공업화는 시장경쟁의 연장으로서, 즉 가격기구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이윤동기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이 방법은 통상 자본주의 경제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공업화라는 생산과정의 변혁, 외부에너지를 도입해 규모의 경제를 살리면서 생산 확대를 수행하는 과정을 자본주의 경제를 통해 진행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사회의 성립이 보이지 않거나 미숙한 사회에서 공업화를 수행하려 할 경우 자본주의 경제를 단시일에 채용하긴 어렵다. 우선 자본주의 경제의 전제가 되는 조건을 준비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법으로 공업화를 수행해야 한다. 다른 방법은 비자본주의적 방법으로 중앙계획경제 혹은 사회주의 경제등의 방법이 있다.
이처럼 경제사회의 성립여부는 각 나라의 공업화 방식에 역사적 결정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동일한 경제사회의 경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천차만별이며 이 다양함은 공업화의 다양함으로 연결된다. 예를 들어, 최초의 공업화는 영국에서 정치력을 갖추지 못한 민간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영향이 나라 전체로 파급되었다는 사실이다. 18세기 영국은 선진공업국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산업혁명을 개척해야 했다. 특히 영국의 공업화는 생활의 여러 국면 가운데 소비재 부문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공업화에 앞서 농업혁명이 있었고, 농업 생산성 향상이 선행하였다. 공업화란 농업혁명에서의 기술 변화를 공업 측면에 확대 적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발견 할 수 있다. 때문에 영국의 산업혁명은 식량에 이어 방적과 직포 두 부문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시작되었고 뒤이어 광산업, 운송, 기계공업, 제철업등으로 파급되어나갔다. 식료와 옷감등의 소비재에서 자본재로 전개되어 나간것이다. 다른나라의 공업화는 조금 달라졌다. 동일한 자본주의 경제를 취했다 하더라도 먼저 공업화를 이룩한 영국이라는 상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공업화를 민간에만 맡겨둘 수 없었고 정부가 개입했다. 선진국 산업과의 경쟁이 될만큼 일정기간 동안 개입한 뒤 그 시점을 지나면 시장경쟁에 맡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같은 경제사회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공업화가 꼭 그 연장선상에 오는 것은 아니며 공업화를 자본주의 경제적 방법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치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상정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경제사회의 성립
위와 같은 관점에서 에도 시대를 바라볼때 간과되었거나 잘못 이해되어 온 문제를 발견 할 수 있다. 에도 시대 사회경제사에 관한 기존의 연구문헌들은 에도 시대의 상업활동 융성을 이야기하며 얼마나 경제적으로 발전한 시대였는지를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막번체제 하에서의 빈곤과 그것을 가져온 영주의 착취, 화폐경제가 가져온 빈부격차 확대등을 이야기한다. 특히 영국과 비교해서 일본의 후진성을 산업자본 미발달, 강력한 막번권력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되는 두 견해는 모두 에도 시대 경제사회의 성립을 말해주는 것이다.
16~17세기를 경계로 하여 일본 사회는 중대한 역사적 전환을 맞이 하였고 이러한 전환을 가능케 한 힘의 중요 요소는 경제사회의 성립이었다. 그 논거로는 인구의 대부분이던 농민이 경제행동을 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농민의 생산동기에 판매와 이윤획득이라는 요소가 들어감으로써 연공과 자급이라는 전통적요소가 남아있긴 해도 농민은 생산의 효율을 추구하려는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른바 소농자립도 이러한 농민 행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에도 시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전국적 상품 유통망 형성도 강력한 증거이다. 예를 들어 보소지방에서 잡힌 정어리가 호시카가 되고 관서지방의 면작 농민이 그 호시카를 이용하는 일이 일어난다. 호시카를 비료로 생산하는 것 자체가 효율적 농업생산을 위한 필요 수단이며 호시카가 유통경로를 따라 운송되었다는 것 역시 상업적 발달을 이야기한다. 물론 물자뿐 아니라 사람도 이동했다. 노비지방의 역사학적 연구에 따르면 그 지역에서 태어나 11세까지 자란 남녀의 60%가 한번은 다른 마을로 이동하고 2/3는 거의 도시생활을 경험한다. 또한 그 절반은 도시에 정착하거나 도시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높은 이동률은 이동에 대한 제도적인 제한이 적어도 중앙 일본에서는 거의 없었음을 보여준다. 물자와 사람과 함께 화폐도 전국을 돌며 전 계층으로 보급되었다. 에도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화폐와 무관할 수 없었다. 인접 분야의 변화도 뚜렷하다. 정보전달 조직과 교육, 특히 서민교육의 보급과 발전을 눈여겨 볼만하다. 서민을 대상으로 한 출판물과 대중오락이 발달했고 정부 보증이 없는 상태에서 행해진 서신왕래를 통해 식자능력이 근대적 교육제도가 확립되지 않았음에도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문화의 대중화 현상은 서민들의 삶이 오직 생존을 위한 삶이거나 생존을 겨우 벗어나는 상황이라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이처럼 경제사회의 성립은 무엇보다 여유의 형성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는데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경제학이나 경제사상의 성립이다. 경제사회가 형성되고 경제법칙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이를 해명하기 위해 경제학이라는 독립된 학문이 형성된다. 에도 시대에는 경제적 사실을 해명하려는 무리가 등장하게 되며 이는 서유럽에서도 비슷한 시기 경제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에도 시대의 사회 경제적 특질
이처럼 경제사회가 진행되었으면서도 서양에서 발생한 공업화라는 변혁이 일본에서는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해답을 찾는 것은 그렇게 용이한 작업이 아니지만 지적해 둘 사항은 경제사회화의 진행이 동시에 공업화의 개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주의라는 과정을 통한 공업화에서 경제사회의 경험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공업화는 비자본주의적 방법이라는 과정을 택할 수도 있기에 경제사회화의 진전을 바로 공업화와 결부시키는 일은 오히려 피해야한다. 따라서 에도 시대의 상업이나 금융의 발전을 단순히 공업화의 원인으로 단정짓는 연구시각은 매우 성급한 결론이 될 것이다.
에도 시대 경제사회화의 진전은 분명 자본주의 경제에 의한 공업화를 비교적 용이하게 하는 조건으로 작용했지만 공업화를 촉발시킨 동력으로 작용했는지는 의문이며 오히려 작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업화를 외부로부터의 에너지 도입과 노동절약 및 자본집약적 기술체계의 공업분야 적용이라 정의한다면 이러한 변화를 초래하는 국내적 전제조건은 농업기술의 발전방향에서 찾아야한다.
에도 시대의 경제사회화는 농민에게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생산목적에 판매라는 요인을 추가하므로써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이 생산량 증대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선 경지면적이 크게 확대되었다. 에도 시대에 일본의 가경지는 대부분 경지화 되었다. 중요한 것은 생산량의 증대가 이 경지면적의 확대를 훨씬 상회했다. 에도 시대 초기, 검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전의 반(反)당 총 수확은 약 1석인데 막부 말기가 되면 1.8석으로 약 두배 가까이 증가한다. 여기에 이모작과 간작등의 수확량이 더해지면 반당 총 생산량은 분명 두배 이상 되었을 것이다. 에도 시대의 농업기술의 발전은 거의 전부가 이런 토지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이는 극히 최근까지 이어졌다. 한정된 경지면적에서 얼마나 많은 수확을 할 수있는가가 농업기술발전의 척도였다. 여기에는 노동투입이 고려된 농업생산성의 문제는 의식되지 않았다. 노비평야 및 주변지대에서 에도 시대 농업생산의 변화를 고찰하였는데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사이에 인구가 증대한 것과 반대로 가축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1000여개의 촌락에서 공통적으로 관찰 되었다. 그 사이 농업생산량이 감소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한 단위의 생산을 실현하는데 요구되는 가축에너지의 투입량이 감소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생산량이 인구변동에 따라 변화하고 존재하는 가축이 모두 농업생산에 투입되었다 가정한다면 생산량 한 단위당 투입된 가축에너지는 1/4까지 감소하였다.
농업생산에서 가축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토지 생산력이 증대되던시기에 가축에너지 투입이 줄어들었다는건 가축이 무엇인가로 대체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바로 인력이다. 쟁기가 괭이 또는 가래로 경운기구가 전환된 것은 가축의 자리를 인력이 대신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농업에서의 고되고 장시간에 걸친 노동은 에도 시대 농업의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첫째로 비교할 것은 에도 시대 이전의 농업에서 보이는 노동력의 형태이다. 통상 신분적 예속성이 강한 후다이게닌(譜代下人)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생활수준은 아마 겨우 끼니를 잇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도 후반기로 가면 예속노동력은 소멸하고 가족 노동력으로 변화한다. 이들은 하나의 경영주체로 활동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근대적 자유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농자립은 연공부담과 가족제도라는 정치, 사회적 기구를 벗어나서는 존재 할 수 없기에 자립은 결코 장밋빛은 아니었지만 에도 시대 이전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고된 노동이었지만 자립의 대가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두번째로 고된 노동이 농민에게는 단순한 고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생한 만큼 재산이나 생활수준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었다. 에도 시대에 농민의 평균수명은 5~10년 늘어났는데 아마 의식주등의 생활 환경 개선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점진적이긴하나 생활수준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농민들의 노동은 단순한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시간의 고된 노동에 근로(勤勞)라는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여기에서 서구, 특히 영국과 비교하여 일본형이라 이름 붙인 전공업화 사회의 경제발전의 성격을 설명하는 도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자본과 노동이 만나는 점을 생산량이라고 한다.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생산량이 증대될경우 점(노동1, 자본1)은 바깥쪽으로 이동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자본이 늘어나고 노동이 줄어드는 방식으로 변화한다면 일본의 근면혁명은 자본의 증가분보다 노동의 증가분이 크다. 이는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 나타난 변화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근면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동일한 경제발전이 왜 산업혁명과 근면혁명으로 나뉘느냐인데 이것은 주어진 토지인구의 비율 또는 중심이 되는 생산의 형태등이 복합된 결과 나온 선택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에도 시대에 화폐경제가 침투하는등 경제사회화의 진행을 보이고는 있었으나 내포된 생산기술의 발전방향이 공업화와 직결될 만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받아 공업화를 결의했을때 정책을 통해 공업화를 추진해야했다. 메이지 정부는 이러한 변화를 강제적으로 창출해내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리고 이미 형성된 경제사회의 조건 하에서 근면혁명을 경험한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특정 성격의 노동력을 국내에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으로 삼아 공업화를 달성했다고 할 수 는 없을까? 이러한 점에서 에도 시대의 경제발전과 메이지 이후 공업화와의 단절과 연속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에도 시대는 국가형성이 진행되던 시대였고, 법과 제도가 완비된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규제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막부와 번 자체가 경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것은 후기에 이르러서였고, 그렇다고 해도 막부가 중앙정부로서 유효한 경제정책을 실시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막부재정의 궁핍을 타개하기 위해 시행하거나 시대에 역행하는 개주(改鑄)였기에 막부는 유일하게 가진 경제정책 수단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에도 시대의 특징을 정치와 경제의 양극화를 발생시키고 상호간의 관계가 발생하는 과정이라고 정리 할 수 있다. 이런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법령을 넘어서 당시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알아야한다. 에도 시대는 혼네와 다테마에가 분리된 시대였다. 다테마에만으로 역사를 조망하는 것은 용이할지는 모르지만 사실을 오인할 여지도 있다. 나아가 에도 시대는 그 시대에 작성된 사료가 무수히 많다. 방대한 기록속에서 시대를 이해하려면 조직적 방법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연구자는 사료의 바다에 빠지기 쉽다.
이상에서 논했던 에도 시대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에도 시대 사회경제사를 다룰 수 있는 근본적 접근법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학문연구의 전문화는 근대사회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에도 시대에 관한 한 에도 시대 자체가 그러한 분화를 가능케해주는 구조로 보이기도 한다. 막대한 사료의 존재와 수많은 연구자들이 좁은 전문영역으로 갇혀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이니 그러한 전문화를 돌파하고 각 방면의 연구자들 간의 분업과 협력을 전제로 한 프로젝트형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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