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차 대전 사이 일본 도시형 수출 중소공업의 역사적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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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근대 일본 공업생산에는 서구의 기술이전을 기반으로 새롭게 설립된 공장제 공업과 함께, 소규모 생산자가 또 다른 축으로 포함되어 있다. 나카무라 류에이가 주장한 ‘재래산업’론에 따르면 서구식 기술에 기반을 둔 공장 이외의 존재가 담당하는 공업생산활동을 단순히 전통적, 후진적 생산형태의 잔존이라 치부하지 않고 근대 이후의 새로운 공업발전의 형태로 본다.
그러나 ‘재래적 경제발전’을 어느 지점까지 일본 또는 동아시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검토가 필요하다. 공업화 과정에서의 비공장적 생산활동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나타났으며 베르크도 18세기 잉글랜드의 다양한 생산형태의 병존을 주장했다. 또한 스크랜턴은 20세기 초 미국의 소량생산이 갖는 의의를 거듭 주장했다.
한편, 근세 일본이나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을 고유의 발전경로로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다. 그 중 하나는 농업생산의 특질이다. 근세 이후 일본의 농업의 축을 소농으로 규정하고 이 소농사회 성립에서 근세 동아시아 공통성을 형성하려는 논의도 있으며 근세 일본을 ‘스미스적 성장’으로 이해하고 영국과 다른 형태로 보는 논의 또한 소농경제를 기반으로 두고 있다.
근대 일본의 재래적 경제발전은 분명 일본 경제사회의 유형적 특질을 반영하ㄴ고 파악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공업화는 본래 탈농업을 동반하며 진행된다. 탈농업화로 공업부분이 공장제로 순화하는 과정에서 소농사회론은 어떻게 공업화 유형의 특질을 낳을 수 있을까? 대부분 공업화와 소농사회를 잇는 구체적 고리는 소농사회의 유산인 ‘풍부하고 질 좋은 노동력의 존재’로 귀착된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소농사회가 공업화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고 구미의 중소공업의 존재가 소농사회를 전제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양차 대전 사이(戰間期) 일본의 도시화는 탈농업화의 단적인 출현이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공업화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며 도시 소공업 세계의 형성과정이기도 했다.
수출 잡화 공업의 변화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 수출에서는 섬유제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최대 수출 공업품은 1930년대 초까지 항상 생사였으며 그 뒤를 견직물과 면사등이 이었다. 그러나 주요 수출 공업품은 섬유제품 뿐아니라 다양한 소비재도 존재하였는데 이를 잡화로 규정하면 각종 섬유산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수출 총액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림 6-1-1,2 에 따르면 잡화는 양탄자, 도자기, 유리제품, 장난감(玩具) 등이었으며 여기에 약제,화학, 종이와 잡품등을 합하여 잡화(광의)로 포괄하였다. 이러한 잡화(광의)는 그 수출액이 생사와 수출액이 비슷해지는 해도 있었다.
수출 잡화의 양적 비중 뿐 아니라 제품 구성변화도 주목된다. 세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로 개항 이후 수출이 시작된 제품군이며 도자기와 칠기등이 있다. 민예품적 성격이 강했고 근세 일본과기술, 생산형태, 노동력 구성면에서 강한 연속성을 갖고 있었다. 두번째로 1880~1890년대 수출이 급증한 제품군이 있다. 여기에는 성냥과 무명끈등이 속한다. 아시아 시장을 대상으로 생산되었고 구미제품의 하급 대체제정도의 위치를 가졌다. 기술, 원료면에서 재래적 요소에 의존적인 일이 많았다. 세번째로 장난감과 메리야스, 잡화등이 있다. 이들은 1차대전기 서서히 증가하여 1920년대에도 수출액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제품군은 기술이전에 따른 새로운 제품이었다. 금속이나 화학제품이며 저가이면서도 시장의 기호에 따라 섬세한 대응이 요구되었다.
잡화 수출의 추이는 섬유제품 수출에서도 나타났다. 수출용 섬유제품이 중간재에서 최종 소비재로 이행했고 면포는 시장의 기호를 고려해야하는 초벌염색 면포로 기울고 있었다.
표 6-1을 통해 주요 공업품 수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데, 공업국인 구미가 가장 진입장벽이 높았다. 생사는 구미시장에 특화되었는데 이는 미국 공업과 보완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최종 소비재로서 구미의 공업 생산과 경쟁관계이던 면직물의 경우 주 시장은 아시아와 기타지역이였으며 구미시장의 비율은 10% 내외였다. 면직물과 비교할때 잡화는 구미시장 비율이 높고 이는 장난감, 장신구, 도자기등이 포함된 잡화 세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장난감 공업의 사례를 통해서 구미시장에 대한 최종재 공업품 수출과 산업발전을 살펴보겠다.
양차 대전 사이 도시형 중소공업의 발전
(1) 장난감 시장과 국제경쟁
일본의 장난감 수출은 1차대전기에 급증했고 20년대 전반 저조, 후반 회복, 30년대 초 하락, 32년 이후 급증, 38년 이후 급감 추이를 보였다. 이러한 궤적은 도쿄의 생산동향과 궤를 같이했다. 고무, 셀룰로이드등을 이용한 새로운 장난감의 생산은 도쿄에 집중되었다. 이 제품들이 일본의 장난감 수출을 지탱했다.
장난감의 수출지역은 북아메리카와 유럽이 중심이었으며 항상 반 이상을 차지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가 중요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인도네시아의 점유율이 높아졌다. 전반적으로 장난감 수출의 주요 대상은 구미의 고소득지역이었고 구미 식민지의 고소득층이 그 뒤를 이었다.
주요 수출시장에서의 경쟁상황은 어떠했을까.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독일 제품이 미국과 영국의 장난감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제품이 사라지자 일본제품이 급성장 했으나 종전 이후 다시 독일제품이 대량 수입되었다. 그러나 수입 총량이 정체했다는 점에서 1차 대전 이후 영국과 미국의 장난감 시장은 관세를 위한 보호정책과 더불어 자국산 장난감이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장난감이 영국과 미국으로 진출한 것은 독일, 영국, 미국의 장난감 산업과의 대항 속에서 생긴 일이다.
이와 같은 경쟁력은 원천은 상대적 저임금이었다. 그러나 수송비와 관세를 생각할 때 유리함은 감소한다. 장난감 시장의 더 중요한 요소는 시장의 기호에 즉시 반응하거나 기호를 창출 하는 일이었다. 장난감 공업의 발전은 이러한 과제에 대응해 얻은 결과였다.
(2) 장난감의 생산조직
양차 대전 사이 도쿄의 장난감 생산량은 전국의 절반 이상이였으며 신소재를 이용한 장난감은 80~90%가 도쿄에 집중되어있었다. 1939년 기준, 금속 장난감은 종사자의 40%가 5인 미만의 작업장에 근무했으며 생산액의 30%를 이 작업장들의 제품이 차지했다. 금속 장난감 외에도 5인 미만 작업장이 종사자 71%, 생산액의 30%를 차지했다. 장난감 공업은 소경영을 기반으로한 산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돈야를 중심으로 한 장난감의 생산조직은 저임금을 무기로한 노동착취적 생산과 비슷하다. 그러나 돈야, 공장, 작업장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만 볼 수 없다. 가내생산은 비숙련 노동과 저임금을 기반으로하지만 이 경우 특허국이나 동업조합에 대한 의장등록에서 알 수 있듯 소규모 작업장도 일정 기능을 보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자적 제품개발의 잠재적 능력을 갖춘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돈야, 공장, 작업장의 관계는 보완과 분업관계임과 동시에, 동일 시장에서의 잠재적 경쟁자이기도 했다. 활발한 신제품 개발은 이와같은 구조에서 가능했다. 아울러 집적의 이익이 장난감 산업 살전의 원동력이었다. 도쿄내에서도 지리적 집중과 집적은 세가지 이점을 가져왔다.
■ 동업자의 집적 - 긴밀한 소통을 통해 시장과 기술정보를 쉽게 었었으며 분업을 통한 이익도 기대.
분업은 진입장벽을 낮추어 산업의 활력을 지탱하는 소경영 발생을 쉽게 함.
■ 보완적인 업자 존재 - 기계, 금속업자가 인접해 있어 직접 생산하기 어려운 거푸집등을 공급함.
■ 소재를 공유하는 다른 업종의 집적 - 기술기반이 유사하면서 다른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의 존재는
유행을 타는 제품인 장난감 시장의 불안정성을 어느정도
상쇄시키는 안전장치 기능을 수행
그러나 집적의 불이익도 초래되었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특허국의 지적 재산권 보호 제도나 공업조합의 제품검사등이 보완되어 도쿄 산업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3) 돈야와 시장정보
도쿄의 장난감 생산은 수출시장의 수요에는 즉각 대응이 가능했으나 그 시장 자체에 소규모 생산자가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기에서 돈야의 기능이 부각된다. 도쿄의 장난감 돈야들은 단순히 해외시장의 주문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유력한 돈야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도쿄상공장려관을 통해 여상단, 견본송부, 견본시장등에 참가를 시도했고 30년대 들어 이러한 돈야의 수는 급증했다. 양차대전 사이의 장난감 무역은 상관을 통한 거래를 넘어 돈야가 무역에 진출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돈야는 생산에도 관여하는 존재였다. 도쿄시 조사에 따르면 장난감 돈야 중 16%만이 순수 상업기능(배급)만을 담당하며 어떤 형태로든 생산활동에 관여하는게 통상적이라 하였다. 그 예가 상품개발 활동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에 적어도 35곳의 돈야가 장난감 관련 실용신안과 의장을 출원 또는 등록했다. 돈야의 상품개발능력은 성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상위 그룹인 도요타야와 마스다야 돈야는 1918년 시점에는 중견 이하의 존재였으나 20년대를 거쳐 30년대에 눈부신 성장을 일구어 냈다. 두 돈야의 공통점은 실용신안, 의장등록이 많았다는 점이다. 구라모치가 90여건, 사이토가 50건이었다. 독자적 상품개발이 돈야성장의 요건이 되었다는점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수출업무 진출을 한 돈야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는데 이는 장난감 돈야가 보유한 생산, 유통상의 기능을 보여주는것이다. 유력 돈야들은 원료공급과 상품개발을 통해 생산현장에 대한 관여를 강화하고, 해외로도 상업활동을 확대해 장난감 생산과 유통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공적 기관의 역할도 있었다. 1921년 설립된 도쿄상공장려관에는 기술개발과 정보를 지원하는 공업시험, 상품진열부, 조사부등이 설치되었다. 장난감은 시장정보와 개척면에서 지원기능이 중요했는데 도쿄상공장려관의 활동은 해외시황을 게제하는 잡지부터 서적 간행, 견본시장 개최, 나아가 여상단까지 조직했다. 이러한 기회에 참여한 돈야들은 수출업무에 진출했고 양차대전 사이 도쿄 장난감 수출을 통해 고소득 국가의 최종 소비재 시장으로 침투 할 수 있었다.
맺음말
양차대전 사이 도쿄의 장난감 생산은 구미시장의 경쟁속에서 발전했다. 경쟁력의 원천은 일정한 질과 가격경쟁력에 있었으며 시장기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는데에 있다. 이는 낮은 임금, 시장정보 획득을 기반으로 신제품 공급을 연계한 유통, 생산조직의 전개였다.
지리적으로 분산된 작업장을 원료공급을 통해 돈야가 조직하는 형태는 도시에 적합했고 돈야가 도시에 위치하면서 수출업무에까지 진출하게 되자 정보획득면에서는 우ㅠ리했다. 또한 생산자의 집적은 집적의 이익을 향유할 수있게 했다. 이러한 도시화의 이익이나 유연 전문화를 도시공업의 발전기반으로 보는 논의는 장난감 공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
도쿄의 공업발전을 담당한 분산형 생산조직은 소경영에서 배양된 제품개발능력과 저임금 노동자를 기반으로 했고 업주이하의 노동자들은 영농 후계자가 될 수 없는 청년이었으며 도시 소경영의 발생은 자영업 취업의 장이면서 농가의 재생이기도 했다. 이는 도시화라는 새로운 환경속에서 재래적 경제발전이 재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탈농업 과정에서 등장한 도시 소경영이 고소득 최종 소비재 시장과 연계하면서 일본의 도시형 수출 중소공업이 성장했고 또한 노동공급 행동의 특성이 기술형성 기능을 내포한 분산형 생산조직을 낳았고 이 생산조직의 특성으로 고소득 최종소비재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양차 대전 사이 일본의 공업발전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만개하는 선진 공업국을 위한 최종 소비재 수철의 선구였다고 본다면 그곳에서 탈 농업 단계 일본 경제사회의 유형적 특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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