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의 경제성장
경제발전은 경제성장보다 더 광범위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경제발전은 한 국가의 1인당 재화와 서비스 생산의 증가뿐 아니라 국민경제 구조의 호전과 합리적 분배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를 정량적으로 고찰할때 1인당 국민소득이나 국민 총생산의 증가는 여전히 발전을 상징하는 기본 지표이다.
1840년 초 중국의 문호는 영국을 위시한 열강에 의해 강제로 개방되었다. 이때의 침략방식은 폭력, 약탈에 머물러 있었다. 1840년 이후 약 30년 동안 유입된 대량의 공업생산품은 중국에서 자리잡지 못했다. 다만 영국만은 노동생산성의 증가와 수에즈 운하로 운송거리 단축으로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다.
중국 전통사회의 경제구조와 생산방식은 1870년에 이르러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전통적 농업과 가내수공업 자연경제가 와해되기 시작했고 이것을 기초로 중국 근대공업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해 중국의 근대경제의 발전은1880년대가 시작이다. 이때부터 항일 전쟁 발발직전인 1936년 까지로 한정하여 이 시기의 경제성장을 거시적으로 파악한다.
1) 인구변동
부와 서비스는 인간이 창조하고 소비하므로 경제발전과 인구변동은 서로 인과관계가 있다. 따라서 인구변동을 살펴보아야한다. 인구증가는 경제발전의 동력이며 다른 편에서 경제수준의 제약을 받는다.
쿠즈네츠의 연구에 따르면 인구증가의 가속화는 근대 경제성장의 기본특징 중 하나이다. 세계적으로는 이 단계가 1750년에 시작했다.
1000년에 2.75억 명이었는데, 1750년에는 7.28억 명에 달했다. 750년 동안 2.7배가 되었고 연평균 증가율은 1.3%였다. 그러나 1750 ~ 1950년의 200년동안 인구는 2.4배 증가하여 25.09억 명에 이르렀다. 이기간 연평균 증가율은 6.2%였다. 또한 1750~1960년의 210년간 유럽, 아메리카등 선진국은 9.5%가 증가한 반면에 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후진국가는 6% 증가하는데 그쳤다.
중국의 인구변동 추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 총인구의 시계열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연구결과가 있지만 아직 시계열 통계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인구통계를 만들기 시작은 중국이긴 하나 통계의 목적이 인두세 징수, 노역할당과 징병에 있었기에 대상이 가구와 성인 남자의 수에 한정 되었다. 1741년에 전 인구 통계가 시작되었고 이러한 통계는 1898년까지 158년간 계속되었다. 1741년 부터 1851년 까지 각 성의 통계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지만 인구 수치에는 불합리해 보이는 큰 기복이 있다. 또한 1852년 부터는 매년 각 성의 통계가 결여되어있다. 1899년 부터는 공문서에는 인구에 대한 기록이 없고 20세기 전반은 현대임에도 불구하고 인구통계는 발전하지 못했다. 이 50년의 기간은 중국 인구통계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기간이고 어느 누구도 학계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시계열 통계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글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각종 기록과 연구의 상대적 신빙성을 가능하여 취사선택 할 예정이다. 사회적 안정과 전통 경제의 번영으로 중국인구는 1730년대부터 빠르게 증가했고 19세기 중엽에는 이미 4억을 돌파했다. 매우 많은 인구와 부족한 토지는 인구와 경지의 비율문제를 첨예하게 만들었고 이는 중국 근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이다.
중국의 전근대에 인구가 상대적으로 빨리 증가하기는 했으나 1850~1949년에 중국 인구의 증가 속도는 구미와 일본등 선진국가의 증가 속도를 크게 밑돈다. 발전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19세기 중엽이후 공업화가 진행 되었지만 인구 증가의 측면에서는 아직 근대적 경제성장 단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자급자족이 목표였던 오랜 역사에서 인구증가 속도와 경제성장 속도는 일치했다. 따라서 일부 경제사학자들은 인구증가 속도로 경제발전 상황을 측정해왔다. 이 관점이 틀리지 않다면 1950~1949년까지 99년간 중국의 발전속도는 완만했고 중국은 경제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2) 국민총소득과 1인당 국민소득의 증가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등 서양국가들은 국민생산과 국민소득의 통게를 내기 시작했고 그후 이 국가들의 19세기 소득을 추정했다. 중국의 국민소득은 194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 중 가장 영향력있는 자료는 우바오싼등의 1933년 중국 국민소득에 대한 조사이고 다른 하나는 류다중의 1920년대 말부터 항일전쟁 전까지의 중국 국민소득에 대한 추정이다. 우바오싼과 류다중은 근거와 추정방법이 달랐고 그 결과로 차이도 비교적 크다.
역사 자료를 활용하고 1930년대 조사를 매개변수로 참조하여 중국 국민소득을 과거로 추정해가는 작업은 장중리의 『1880년대 중국 국민총생산 추계』가 있다. 중국 통계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서양 국가나 일본처럼 국민의 국민소득 시계열을 산출해내기는 아직 어렵지만 추정치를 독자에게 제공한다.
3) 산업구조의 변화
국민경제의 현대화 과정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국민총소득, 1인당 국민소득의 증가와 더불어 국민경제의 구조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87~1914년은 중국의 근대 공업이 태동한 시기이며 제국주의 투자가 대량으로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 시기 경제성장은 서양 공업국가와 비교해서도 빠르며 중국경제는 저점의 골을 벗어나 마이너스 성장에서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국민 총소득은 물론 1인당 국민소득 증가율도 높지는 않았다.
국민소득은 143.43억 위안에서 187.64억 위안으로 30% 증가해서 연평균 성장률은 1%였다. 1인당 국민소득도 38위엔에서 41.22위안으로 8% 증가했고 연평균 0.3%에 그쳤다. 경제구조는 변화했지만 변화의 속도는 느렸다. 여러각도에서 보면 중국의 공업화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근대 경제성장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1914~1936년에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불경기와 31~35년 경제위기를 겪었음에도 비교적 크게 발전했다. 국민 소득의 연평균 성장률은 1.45%에 달했고, 1인당 국민소득은 1%, 근대적 부분의 생산은 7%에 달했다. 그러나 근대 생산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로 낮았다. 국민경제의 전체적인 발전에서 보면 중국경제는 아직 전통경제에서 근대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었다.
중국 근대경제의 중장기파동
1) 이론의 전제조건
중국 근대의 경기변동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없다면 근대경제에 대한 연구가 과학적이지 못하게 될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경제운영의 내적 메커니즘에도 깊이 접근할 수 없다. 경기변동을 연구하는 가치는 경제성장을 설명하는데 국한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해당국가의 투자, 이윤, 취업,가격등 여러 요인의 주기적 변동과 그 상관관계의 기초 위에서 국민경제의 성장과 내적 메커니즘에 대해 깊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
중국 경기변동에 대한 연구는 아직 취약한 부분이다. 1980년대 들어 건국 이래의 경기 변동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주로 단기파동(3~5년)에 한정되었다. 단기파동 연구는 중국 경제 운영을 관찰하는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계절, 우연성, 외생요인의 영향을 쉽게 받으므로 규칙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경제사적 연구가 필요하다.
서양에서는 경제주기에 대한 연구가 이미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서로다른 내용의 많은 주기이론을 형성했다. 프랑스의 쥬글라 이후로 경제학자들이 수리통계 방법을 이용 했고 경기변동 이론의 발전을 촉진했다. 그 결과 세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경기변동이 공업국가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아가 대부분의 경기변동은 내부 요인과 외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 내부요인- 기술혁신, 신투자, 재투자, 가격, 이자율변동, 소비자기호, 산업구조 변화
■ 외부요인- 자연재해, 전쟁, 정책, 제도상의 변화
경기변동에 관한 서양의 연구는 장기간의 노력과 발전으로 경제학 이론에 중요한 공헌을 했고 현실 경제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경기 변동 연구는 경제사 연구가 기초되어 심화된 것이고 이론과 방법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2) 자료의 선택과 채택방법
(1) 주기 측정의 각종 지표 선택
자료수집과 정리과정에서 중국 근대의 경제에 대한 거시적 통계분석은 아직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 국민 총생산의 연속적 수치가 없고 각 부문과 업종의 생산액과 생산량등에 관한 자료도 완전치 못하다. 그러나 중국 근대경제발전에 대해 계량분석을 절대로 할 수 없다는것은 아니다. 실제로 1960년대부터 서양학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성과를 보였다. 이 글의 주제는 경기변동의 기본추세인데 어떤 연도의 수치에 오차가 있더라도 전체 파동은 믿을만 하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가능한 많은 경제수치를 운용하고 그 파동의 동시성을 이용해 주기를 판단한다. 콘드라이티예프나 쿠즈네츠등 많은 서양학자들이 십수개에서 수십개의 지표를 이용했다.
이론적으로 각각의 단일 지표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해당 부문의 상황만 아니라 관련 부문의 상황도 반영한다. 가격, 수출입지표등은 지표 그 자체로 종합적인 것이기도 하다. 중국 근대경제 중장기 파동에 이용 할 수 있는 지표는 세가지가 있는데 가격, 무역, 생산이다. 그러나 생산은 방추를 제외하면 20~30년의 시계열을 가져 중장기 파동을 계산하는데 이용할 수 없어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 가격지표 - 물가에 관한것으로 물가 총지수, 공업품 도매가격지수등이 포함
■ 무역지표 - 수출입액의 변동으로 국민경제의 파동주기를 측정
■ 생산지표 - 생산상황을 나타내며 연속적 국민총생산 지표가 없는 상황에서 경제주기 파동을
계산하는데 비교적 이상적이다.
(2) 주기 계산방법
이 글의 연구대상은 중장기 파동이기에 콘드라티예프의 계산방법을 참고하였다.
■ 콘드라티예프 계산법의 요점 - 비교적 완전하고 정확한 통계수치를 수집, 정리
- 종합적인 특징을 보이는 경제지표를 선택하고 이러한 지표를 모은다.
- 모은 지표를 토대로 국민경제의 전모를 개괄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 지표: 상품가격지수, 이자율, 임금, 무역액, 광공업의 생산량
- 장기파동을 나타내기위해 9년 이동평균법을 사용해 단기주기 제거
한 시계열의 장기추세를 계산하는 목적은 세가지가 있다.
첫째, 어떤 경제지표가 장기적으로 성장했는가 쇠퇴했는가를 연구한다.
둘째, 추세선을 구하고 그것을 연장하여 미래를 예측한다.
셋째, 추세선을 구한 다음 원래의 수치와 그것에 대응하는 추세치의 편차를 계산한다. 우연성이 포함된 편차이므로 연도별 통계수치를 통해 불규칙변동부분만 제거하면 주기파동을 뚜렷이 나타낼 수있다.
3) 중국 근대경제발전에서 중장기의 파동의 특징
통계수치에 각종 처리를 한 끝에 중국 경제발전과정의 중장기 파동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처리를 거친 통계수치는 주기성 파동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낸다.
(1) 물가지수의 변동
물가지수의 시계열로 세가지 지표를 선택했다. 도매물가 총지수, 공업품 도매물가 지수, 농산품 도매물가지수이다. 이 시기의 중국은 공업품 물가의 변동이 경제발전 과정의 주기성 파동을 잘 나타낼 것 이다.
■ 첫 번째 중장기 주기는 1886년에 시작해 1903년 정점에 도달했고 1904년 부터 하락해 1914년에 저점에 도달했다.
■ 두 번째 주기는 1915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해 1931년 정점에 이르렀고 1932년 하락해 1934년 저점에 이르렀다.
■ 1935년 다시 새로운 경제 주기서 시작되었으나 항일전쟁 발발로 중단 되었다.
(2) 대외무역지수의 변동추세
대외무역액과 지수의 서열에 관한 자료는 풍부하지만 중국 대외무역 총지수, 순수출액, 순수입액, 수입물량지수, 수출물량지수만을 선택했다. 이 다섯가지 지수를 관찰한 결과 순수입액 변동의 주기적 파동이 가장 뚜렷하고 앞의 물가지수의 변동과 일치했다.
(3) 생산지수의 변동추세
확보한 자료에 한계가 있으므로 생산과 관련한 지표는 시계열의 길이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1910~1930년의 지표는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중장기 파동을 나타내고 있다. 1920년대 이후 근대 생산투자는 비교적 높은 수준에서 발전하여 1920년대에 전체적으로 말안장형 파동을 나타냈고 1930년대 들어서 급속히 하락했다. 이것은 일본의 침략과 중국에서의 외국자본 철수와 연관이 있다.
(4) 종합지수 분석
중국 근대경제 성장과정에서의 각종 경제지표의 주기파동에 대해 개별적으로 관찰한 결과, 추세 처리 후의 각종 시계열과 그것으로 도출해낸 그림에서 상승 또는 하락의 시기가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동시에 파동의 정점과 저점도 한정된 구간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동시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국 근대경제발전 과정에서 평균 25년 정도 중장기파동이 존재한다고 판단 할 수 있다. 중국은 근대화가 시작된 1870년대 이후로 적어도 2개의 완전한 경제주기를 거쳤다. 1880년대 중기에서 1910년대 중기가 첫번째 주기이고 1910년대 중기부터 1930년대 중기 까지가 두번째 주기이다.
중국 근대경제발전 과정중의 중장기 파동을 선진국과 비교할때 공통점은 아래와 같다.
■ 중국 근대경제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주기성 파동의 평균 길이가 미국, 일본과 같다.
(중국-25년, 일본 -22년, 미국 20년)
■ 미국, 일본과 비교하면 중국의 파동에도 뚜렷한 상승경향이 있다.
■ 세계 자본주의 국가의 파동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동시적이었다.
4) 중국 근대경제 중장기파동의 요인 분석
중장기 중기형성의 원인에 관해 많은 토론이 있었다. 이 이론들을 크게 두가지로 나누는데 내생 경제주기론과 외생경제주기론으로 나뉜다.
내생 경제주기론은 경제 주기의 발생의 원인이 경제 내부에 있고 그 요인으로는 기술, 화폐와 신용, 금융부문의 과잉투자, 심리요소 등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외생 요인이 경제주기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외생 경제주기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주요 요인이 경제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며 내부요소는 주기파동 형성에 약간의 영향을 줄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는 중국 근대 경제주기 형성은 전반적으로는 경제 활동에 내재적인 요소가 주요 작용을 했다고 판단한다.
(1) 기술과 관리제도의 진보는 중국 근대경제발전 과정에 두 번의 번영을 가져온
결정적 요인
양무운동으로 인해 근대 공장제도가 도입되며 중국경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모두에서 새로운 시대에 진입했다. 1880년대 중기 이후 민영공업이 규모를 증대시키고 양무파 기업도 민영화되는 수순을 거쳤다. 관리제도에서 봉건적 색채가 얕아지고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어울려 발전했다. 그러나 1905년부터 시작된 10년의 불경기 이후 1차대전기부터 20년대까지 근대 공업 중 근대적 생산이 발달했던 소수 업종은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고 기술과 생산관리 의 개혁을 단행했다. 낙후된 수공업 업종들도 기계화를 시도해 기술진보를 이뤄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전력의 보편적 이용과 증기와 전력으로 인력대체, 외국산을 이용한 설비개선과 개조등이었다. 이는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근로자의 노동생산성을 향상시켰다. 결과적으로 1차세계대전에서 시작된 전력의 이용과 생산설비의 갱신, 그에 상응하는 생산관리의 발전이 중국 근대경제발전과정 중 두번째 주기의 상승을 유도했다.
(2) 투자규모의 확장과 수축은 경제호황과 쇠퇴의 직접적인 요인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중국에서 기업이 연이어 설립되고 발전한것은 중국 근대 1차 투자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청일전쟁 이후 열강이 중국에서 공장설립에 대한 권한을 획득하면서 중국투자의 열기는 고조 되었다. 그러나 1905년 중국경제가 쇠퇴하며 1908년 투자규모도 감소되었다. 또 1919년을 시작으로 투자가 대폭 상승하고 1931년까지 정점을 찍다가 증가속도가 줄어든다. 이는 일본의 침략이 다른 외국자본이 중국에서 철수하도록 가속화 했기 때문이다.
투자 증감과 경기변동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하지만 변동곡선은 일치한다. 1931년 투자 성장속도가 하락하면서 두번쨰 경제주기의 하락기와 겹쳐 중국경제는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3) 국제시장과 국내시장의 영향
중국 근대 경제발전의 자연적 성장이 아닌 외국 자본주의 침략의 결과였다. 또한 세계 주요 자본주의 국가 경기변동의 동시성은 중국경제가 세계 시장에 편입되어 서양 열강의 경기변동이 파급된 결과이다.
영국의 저가 면방직품은 중국 농촌의 자연경제를 와해시켰고 그것이 근대 공업발전을 위한 조건을 만들었다. 이것이 1880년대 중기에 시작한 중국의 첫번째 주기파동중 경기상승의 전제 조건이다. 또한 1905년 이후 중국경제의 하락은 1907년의 세계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 동시적으로 발생한 경제위기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이 외 중국 근대경제발전 과정에는 평균 25년 정도의 주기 외에 평균 10~12년의 중기 주기가 존재하는데 이는 중국의 중장기 주기보다는 세계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와 더 뚜렷하게 일치한다.
(4) 정부의 경제정책과 행위의 영향
청 정부는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에서 메이지 유신정도는 아니지만 분명히 중국 근대경제발전을 위한 사회 환경을 만들었다. 민간기업의 규제를 해제했고 경제 관리 기구도 개혁했다. 이어서 신해혁명으로 성립된 중화민국의 설립역시 자본주의 상공업의 발전을 위한 제도 제정을 보장하는 일이었다. 난징 국민정부 수립이후 관세 자주권이 회수되었고 이를 통해 중국의 공업을 보호, 발전 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 국민정부는 재정수입이 북양정부 시기에 비해 크게 증가하여 다방면으로 투자가 증가했다. 또한 1935년 화폐개혁으로 물가를 회복하고 새로운 주기의 성장기에 들어설 수 있었지만 전쟁으로 성장기는 중단되었다.
(5) 정국의 상대적 안정은 경제호황의 전제조건
태평천국운동이 진압된 후 1870년대에 중국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발전했다. 이는 근대경제 성장의 첫번째 조건을 형성했다. 그러나 1905년 청조의 멸망이 임박하자 국내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이는 경제 후퇴로 이어졌다. 중화민국의 설립으로 안정을 찾는가 했으나 곧 북양군벌의 혼전으로 그 국면은 파괴되었다.
평화적인 환경의 결핍은 중국 근대경제발전이 늦어진 기본적인 요인이다. 정치적 불안은 군사적 성장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외 투자자역시 신규투자를 꺼렸기에 경제성장에 불리할 수 밖에 없다.
중국 근대경제 성장의 전체적인 추세와 발전단계
중국 근대경제 발전은 1880년대에 시작했고 1930년대 중기까지 근대화와 공업화 발전추세가 지속되었다. 특히 1920~1930년대 중기 발전이 빨랐고 근대적 광공업과 교통운수업의 발전이 빨랐다. 그러나 근대경제가 국민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아 국민경제 전체적으로 보면 발전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근래 중국 근대경제발전에 대한 연구는 깊어졌지만 교과서나 저작물은 여전히 전통적인 시기 구분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기변동을 근거로한 구분법은 아래와 같다.
■ 제1단계 - 1850 ~ 1887년 : 국민총소득과 1인당 국민소득의 성장이 없으며 오히려 하락추세
■ 제2단계 - 1887 ~ 1914년 : 가장 근대경제 성장이 빠른 시기, 근대경제의 발전기
■ 제3단계 - 1914 ~ 1936년 : 두번째로 근대경제 성장이 빠른 시기, 근대경제가 진일보한 시기
■ 제4단계 - 1936 ~ 1949년 : 1인당 국민소득의 하락폭이 1단계를 초과하는 근대경제의 후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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