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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경제의 근세와 근대, 1600 ~ 1900 : 그 공통점과 차이점

정신분열초기/역사자료저장소

by 에이구몬 2020. 12. 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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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리말
      세계의 광역경제권은 현재 유럽연합과 북미자유무역협정, 그리고 동아시아로 나누어져 있다. 그 중 최근 가장 두드러지게 부상하고 있는 동아시아 광역 경제권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이 유럽, 미국과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이에 대한 고찰과 경제사 이론 자체를 동아시아 역사적 경험까지 포함하여 재구성 하고자 한다. 

          조선, 중국, 일본은 동아시아 광역 경제권에서도 동남아시아에 앞서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 이를 서유럽 중심의 형성과정의 시점에서 벗어나 동북아시아만의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독자적 내재적 조건을 찾으려 한다. 이를 통해 동북아시아 연해지역에서 서유럽이나 미국과는 다른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있는 현상을 규명하려 한다.

  1. 소농사회의 성립과 발전
    1) 소농사회의 역사적 위치
        소농이란 부부와 그들 자녀를 기본 구성요소로 하는 소가족의 소규모 농업경영을
    의미한다. 이러한 형태는 원시사회 말기 정착농업이 생산의 중심이 되며 전세계에       일반적으로 나타났으나 소농경영이 안정되며 자립성을 띄는 일은 15세기, 16세기 서유럽과 동북아시아 연해지역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소농사회를 기반으로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 
        지금까지의 경제이론은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을 통해 농민이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로 나뉜다고 설명해왔다. 자연스럽게 소농은 전근대사회의 잔존물로 취급되었으나 농업은 공업과 달리 자본주의화 하지 않고 소농경영이 충실해지고 생산력이 강화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자본주의적 농업이 발달한 영국은 매우 특이한 예에 속하며 영국 역시도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농경영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소농사회는 농업사회가 가장 발달한 단계이며 자본주의를 창출 할 수있는 모체가 되었다.

    2) 동북아시아 소농사회 성립
        몬순지대에 속하는 동북아시아 연해지역은 고온다습하고 작물이 매우 왕성하게 자라는 반면 잡초도 많기에 제초작업이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의 소농경영은 노동집약적이며 동시에 토지생산량이 높다. 높은 토지생산량을 위해서는 질 좋은 경작지가 필수인데 벼를 주로 경작하는 지역 특성상 수리, 관개시설이 잘 정비된 배수가 잘되는 논이 질 높은 경작지 이다. 이를 조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토목기술과 막대한 자재, 노동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농업생산의 기본요소인 토지, 노동력, 자본 가운데 서유럽은 토지와 자본을 중시했고 동북아시아 연해지역에서는 토지와 노동력을 중시했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적어도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토지자본의 중요성이 매우 커져있었다. 동북아시아 에서는 고도로 발달한 경작지에서 벼와 면화, 유채씨, 사탕수수등의 원료용 작물을 윤작했고 이모작과 삼모작을 사용했으며 심경을 통해 비료의 효율성을 높였다. 동북아시아는 15~16세기 세계에서 가장 발달하고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자립적 소농사회를 유지했다.

    3) 양쯔강 하류지역
        양쯔강 하류지역의 삼각주는 농업의 선진지대였으며 삼각주 주변의 하천이 흐르는 골짜기 주변 평야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농업이 이루어졌다. 이곳이 농업 선진지역으로 여겨진 것은 명나라 중기(15세기) 이후이다. 이때 치수사업으로 타이후호의 물길이 양쯔강에서 분리되어 침수피해가 줄었고 배수도 체계화 되었다. 그와 더불어 지대가 낮아 제방으로 둘러싼 위전과 둑으로 둘러싼 우전이 개수되고 내부가 장방형으로 바뀌면서 관개와 배수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경작지로 변모했다. 벼 품종 역시 다비 다수확 품종으로 바뀌었고 시비법과 제초기술도 개량되었다.
        이같은 기술 진보를 통해 소농경영규모는 송대에 30무에서 명,청시기 10무로 줄어들었다. 동시에 양잠, 제사, 면가공등 가내공업이 도입되어 다각적 복합경영으로 발전했다. 명,청시기에는 20무 이상의 부농과 2.5무 이하의 영세농이 다수 존재 했으나 중화민국 초기에 중농표준화가 진행되었고 동시에 자립적소농을 기반으로 경작지를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는 소차지농제가 발달했다.

    4) 화베이, 쓰촨, 둥베이등 자립적 소농이 덜 발달된 지역
        화베이와 둥베이 지역은 몬순지대에서 벗어난 밭농사지역으로 강우량이 적어 건지농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땅의 수분이 증발 하는것을 막기 위해 얕게 쟁기질 하고 눌러두는데 토지생산성은 낮았다. 송대에는 소 두마리가 이를 쟁기질을 하는데 사용되었고 명,청대에는 서너마리의 소가 쟁기를 끌었다. 쟁기를 이용할 경우 100무를 경작하는데 4~5명의 인원이 필요했고 이를 통해 고용노동력을 이용하는 대규모 경영이나 분익농제를 했다.
      한편 20무 이하의 영세농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이들은 소나 쟁기같은 대형 농기구가 없었기에 분익농이 되어 지주에게 토지를 빌리면서 농기구를 빌리거나 경작지를 부농에게 갈아 주길 부탁해야 했다. 이렇게 수확을 일정비율로 나눠갖는 분익농제가 발달했다. 또한 하층농민은 고용농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둥베이는 청의 발원지로 19세기 말까지 청왕조가 출입을 금했으나 19세기 들어서 금기를 깨트리고 이곳에 한족이 들어가며 개척이 시작되었다. 화베이와 마찬가지로 건지농법이었으며 새로운 개척지였기에 고용노동력을 많이 활용하는 대경영이었다.

5) 조선
   조선은 남부와 북부의 농업형태와 발달정도가 많은 차이를 보였다. 북부는 인구가 적고 주로 밭농사를 주로 하였다. 분익농제인 타조법이 발달했다. 이는 중국의 화베이, 둥베이 농업형태와 비슷한 농업형태였다.
  남부지역은 강우량이 많아 논이 매우 많았으며 소차지농제의 형태가 많았다. 15~16세기에 노비인구가 감소하고 양민이 증가하며 소농경영이 발달하였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에 일본과 청의 전쟁으로 인해 인구와 경작지가 격감했지만 이후 회복하여 자립적 소농이 일반적으로 형성되었다. 이앙법과 제초작업등 소규모 가족의 노동력만을 이용한 집약적 농업기술이 발달했고 대경영보다 우위에 섰다. 그러나 조선의 경작지 개발은 하천이 흐르는 골짜기 주변의 중소 평야와 수심이 얕은 서해안 간척지 중심으로 이루어져 송대의 강남개발, 일본 중세의 개발과 비슷한 면이 있다. 대하천의 하류 유역이 개발되어 비옥한 논농사 지대로 바뀌는 것은 일제강점기대에 들어와서이다.

6) 일본
  일본의 소농사회 형성은 14세기 말부터 시작되지만 16세기, 17세기를 거치며 본격화했다. 17세기에는 일본의 사회적 경제적 대발전기였다. 이 시기에 인구와 경작지가 양적, 질적으로 발전했다. 중앙정과 지방정권도 소농의 자립을 촉진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개개의 영주가 할 수 없는 대하천의 치수는 막부가 다이묘를 동원해 추진했다. 또 일본의 소농사회 성립에서 중요 요건은 15~17세기 동아시아 광역교역권의 형성과 발전이었으며 이를 통해 중국에서 선진기술이 전해졌다.
  일본은 중국에서 생사, 견직물등을 들여왔으며 금,은,동등의 금속을 수출했다. 이에 화폐를 만들 재료가 부족해져 무역을 제한하고 수입품을 국산화하기위해 노력했다.  이에 대한 결과로 15~18세기에 면화와 면직물, 생사와 견직물, 자기와 차, 설탕과 담배를 국산화하였다.
  일본의 자립적 소농은 성립 당시부터 다각적 복합적 경영을 발전시켰으며 자급하고 남은 양을 시장에서 판매하는 소상품 생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소농의 성립은 에도 시대 시장경제발달의 기반이 되었다.

  1. 동북아시아 3국의 분기점
    1) 문제제기
       동북아시아 연해지역은 시기 또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15~18세기에 소농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일어난 3국의 변화차이는 매우 컸다. 3국의 차이는 영국주도의 세계자본주의에 동북아시아가 잠식당하기 이전에 생겼으며 주로 국내적인 조건으로 인해 생겼다. 이 시기를 조선의 후퇴, 중국의 정체, 일본의 발전으로 개괄할 수 있다.
      세계자본주의에 잠식당하는 단계에서 3국의 차이는 종래까지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해왔다. 중국과 조선은 중앙집권적이며 자급경제였으나 일본은 분권적 봉건사회이며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했다는 설명이다. 이는 타당성이 있으나 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이라는 특정시기라는 점과 조선과 중국을 묶지 않고 3국을 비교한다는 점이다.
        3국의 18~19세기 전기의 대조적인 변화를 수량적으로 알수 있는 몇가지 측면을 살피고자 한다.

    2) 국내총생산, 인구, 1인당 소득
        ■일본 - 일본의 인구는 17세기에 급증했으나 18세기 초에서 19세기 초까지 1세기동안 3,000만명에서 정체하였다. 이후 1820년대 다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해 메이지 이후에도 계속 증가했다.
        ■중국 - 중국에서는 1700 ~ 1850년에 인구가 1억 4,000만명에서 4억 1,000만명으로 3배 증가해 일본과 대조적이다.  이 시기 중국의 경제발전은 인구증가에 따른 외연적 발전이며 생산성 증대등 내포적 발전이 아니었다.
    매디슨은 중국과 일본의 1인당 실질소득을 추계하였으며 그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중국은 정체를 보이는 반면 일본은 17세기말 중국을 따라잡아 19세기 중엽 중국을 40%정도 웃도는 수준에 이르렀다.

    ■조선 - 조선은 이헌창의 『한국경제통사』를 이용하여 추계하였는데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중엽까지 150년간 총생산은 19%밖에 늘지 않았으며 1인당 생산은 전혀 늘지 않았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총 생산도 전혀 늘지 않았으므로 1인당 생산은 감소했을 것이고 19세기 후반에는 인구와 총생산 모두 감소했다.
    ■요약 -  일본은 인구가 거의 늘지 않았고 1인당 소득이 빠르게 증가했다. 중국은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고 조선도 인구가 늘어났으나 두 나라 모두 1인당 소득은 전혀 증가하지 않거나 다소 감소했다.

3) 시장, 도시
    ■일본 - 에도 시대의 특징은 급속한 도시의 발전이다. 병농분리와 조카마치 건설, 참근교대 등 여러 요인으로 도시가 발달한다. 인구 1만 명 이상의 도시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600년에 4.4%였으나 1820년에는 12.3% 까지 증가한다.
  일본의 도시인구는 에도가 100만에서 110만명, 오사카와 쿄토가 각각 40여만명 이었다. 그 외 조카마치가 전국적으로 발달했다. 조카마치 중 규모가 컸던 나고야와 가나자와 등의 인구는 10만명 전후 였다. 일본의 정기시는 중세부터 전국에서 열렸으며 17세기 이후에는 다이묘의 영지에서 농촌 소도시가 증가했고 조카마치를 핵으로 하는 도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중국 - 중국에서도 명대에 이미 강남에서는 정기시와 상설점포가 생겼고 화베이지역에서는 16세기부터 정기시가 증가해 20세기 전반까지 존재했다.
    ■조선 - 15세기 후반에 출현하여 17세기 초에 수백여개, 1770년에 1,062개가 있었다. 모두 5일장이었으며 20세기까지 농촌 상업거래의 중심이었다.

4) 상품, 유통, 이자
    ■일본 - 근세에 도시와 함께 유통이 발달했다. 중심은 에도와 오사카, 쿄토였으며 에도에는 50만명을 넘는 무사인구가 거주 했다. 에도는 거대한 소비도시로써 많은 소비재가 모여드는 시장이었다. 전국적으로 최대 상품은 쌀이었는데 에도와 오사카가 중앙 시장 역할을 했다. 특히 오사카에는 현물이나 증서인 고메깃테를 거래하는 시장이 성립했고 1730년에는 회원제로 운영하는 도지마 미곡거래소가 성립하여 전국의 쌀값 결정을 주도했다. 18세기말에 들어서며 상품작물이나 제조업의 발달로 쌀의 비중은 낮아졌지만 여전히 압도적이었고 면관련 상품이 뒤를 이었다. 이자의 경우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거래비용이 낮아지고 경쟁이 촉진되어 자본 수익률이 낮아졌다.
    ■중국 - 명, 청시대에는 재정적 물류가 축소되어 각 성에서 베이징으로 보내는 쌀은 연간 300~400만 석이 전부였다. 또한 주로 원격지 유통이 주로 발달했고 이 원격지 유통에서 객상과 아인이 등장하였다.
    ■조선 - 조선은 재정적 물류가 압도적이었고 상업적 물류는 부차적이었다. 국지적 시장은 주로 보부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원격지 유통은 강이나 연해지역의 배를 이용한 운반을 통해서 서울을 잇는 유통이 중심이었다. 중국 원격지상업에서 나타나는 아인처럼 객주가 나타나기도 했으나 발달하지 못하고 왕족과 관료에게 독점되며 해체되었다.

 

  1. 지배체제와 유형적 차이
    1) 재정규모
         18~ 19세기 조선, 중국, 일본의 경제적 변화를 둘러싼 차이는 지배체제의 질적인 차이에 있다. 그 점을 재정을 중심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일본 - 에도 시대에는 막부가 총생산량의 1/4를 영유했고 그 대부분을 직속가신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머지 3/4는 260여 다이묘가 영유하며 독자적으로 지배하였다. 전국 공조액을 알 수 있는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이며 1871년 전국 공조액은 1,255만석이다. 1870년 인구는 3,440만명으로 1인당 공조액은 0.365석이었다.
        ■중국 - 1812년에 세입액이 4,014만냥 이었고 미가로 이를 계산했을때 일본석으로 약 1,000만석이었다. 인구는 1811년 기준 3억 5,860만명이므로 1인당 부담액은 0.025석이었다. 이는 일본의 1/13에 해당한다.
        ■조선 - 18~19세기 국가세입을 쌀로 환산하면 192만 석 이었다. 일본 석으로 환산하면 약 96만석이다. 1800년 추계인구가 1,650만 명이므로 1인당 0.058석이며 이는 중국의 2배, 일본의 1/6에 해당한다. 위 내용을 그래프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단순 양적 비교이지만 일본의 과중한 세금이 눈에 띈다.

2) 지배형태: 집권과 분권의 형태
    ■일본 - 막부는 에도, 오사카, 교토, 나가사키 등 주요 도시와 주요 광산을 직할령으로 두고 화폐발행권을 막부에 집중시켜 압도적 경제력을 가졌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무역과 광산이 쇠퇴하며 영향력이 떨어졌다. 다이묘들 역시 산킨코타이제도나 많은 가신들로 인해 재정적 궁핍을 호소 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영지 경제발전을 주도했다. 초기에는 영주가 주도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상인, 지주, 농민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영지는 다이묘를 정점으로한 무사집단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상공업자와 농민을 포함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이 같은 과정속에서 사쓰마, 조슈번과 같이 막부 타도파가 성립했고 메이지유신의 조건이 만들어졌다.
    ■중국 - 명말의 일조편법 개혁에서부터 18세기 지정은제를 실시할때까지 국가재정 대부분이 은을 기본으로 이루어졌다. 현물재정은 약 9000만석이었는데 그 중 절반은 베이징에서 궁중소비, 관료녹미, 군량으로 소비되었고 절반은 각 성에서 소비되었다. 국가재정에서 은이 차지하는 비중이 80%를 차지하자 재정이 은 가격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7~19세기 은가격이 장기적으로 하락하자 정부 수입은 크게 감소했다. 명대 시행했던 납세조합인 이갑제는 16세기 중엽부터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했고 국가의 징세능력은 저하되었다.
    ■조선 - 조선의 가장 큰 특징은 실물재정이 중심이라는 점이다. 대동법 실시와, 균역법으로 인해 18세기에는 농민의 세부담이 쌀과 면포로 통일되었다. 조선은 징세를 위한 인공적인 조직 없이 재지 양반과 향리를 기반으로 촌락을 지배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는  20년 마다 시행되어야할 양전이 전혀 실시 되지 않았고 가뭄과 홍수등의 자연재해가 증가해 과세경지가 점차 감소했다. 조선의 또 다른 특징에는 환곡제도가 있다. 농맨의 재생산 유지를 위한 제도이나 이 제도 역시 19세기에 붕괴되었다.

    ■요약 - 조선과 중국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장악력이 말단에 이르러 약해져 조세 징수액이 적었으나 일본은 강력한 지배체제가 말단까지 닿아 무거운 조세징수가 가능했으며 중앙정부가 화폐유통량을 통제하며 시장을 창출해 보다 빠르게 상품경제 시장을 창출 할 수 있었다.

 

3) 재정의 붕괴와 근대적 변화
   ■중국 - 중국 재정 해체의 결정적 계기는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태평군의 지배지역에서 중앙에 상납하던 세가 중단되자 중앙재정은 파탄을 맞았다. 새로 제정된 이금제도와 해관세등이 재정의 주요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이는 중앙으로 가지 않고 성의 총독이나 순무의 손으로 들어가 성의 재정이 중앙으로부터 자립해갔다. 이후 청일전쟁과 의화단 사건으로 청의 재정은 19세기 후반 완전히 해체되었다.
    ■조선 - 조선도 19세기 중엽 본격적으로 해체되었다. 환곡은 1840년대에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중앙재정의 지세 수입 감소를 보충하기 위해 상인에게 독점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곧 원격지 상업의 몰락을 의미했다. 더욱이 이는 정책이 아닌 왕실과 관청, 관료가 사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중앙 재정의 몰락을 초래했다.
    ■일본 - 그러나 일본은 번의 폐지 이후에도 공조액을 유지했다.

 

  1. 근세경제 모습의 차이와 공업화

        ■중국 - 국가재정은 19세기 후반 급속하게 변질되고 해체되었다. 따라서 근대화, 공업화 정책을 취할 재정적 능력이 없었다. 광서신정도 정책입안 단계에서는 근대적 개혁안이었으나 거의 실행되지 못하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성립한 중앙정부도 독자적 재원이 1,200만냥에 불과해 선후차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공업화 정책은 오히려 재정적으로 자립한 지방정부가 추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기반이 약해 비용이 많이드는 사회기반시설은 본격적으로 정비하지 못하고 근대공장 건설에 중점을 두었다.
        ■조선 - 조선은 중국의 재정보다 더 열악했으며 1876년 이후 청과 일본의 개입으로 실효성 있는 개혁에 착수 할 수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실효성있는 개혁에 착수 했으나 1896년 세입예산은 481만원에 불과 했고 1896~1904년 평균 세출은 군사비가 31.8%로 대부분의 세입이 군사비로 쓰였다. 상공부문은 2.1%에 불과해 정책적으로 공업화를 시도했더라도 정부가 실시하기는 불가능했다. 

    ■일본 - 일본은 재정적 여유를 통해 상당한 자금을 공업화 정책에 투입할 수 있었으며 관영공업과 더불어 대부분을 사회기반시설 정비에 사용했다. 1900년 재정수입은 중앙이 2억 9,300만 엔, 지방 포함 4억 1,200만 엔으로 3국중 가장 규모가 컸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재정개혁과 경제발전으로 이어져 재정 규모는 급속히 증가했고 중국, 조선과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재정자금을 투입하여 정부주도의 대공업을 일으키는 일은 3국중 일본만이 가능했다.
    중국과 조선은 중앙의 지배가 농촌까지 미치지 못해 재정적 기반이 약했고 세계시장 편입전 소농사회의 성장에 대응하지 못한 채 중앙집권국가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세계시장 편입 이후에는 해체가 가속화 되었다. 그러나 시기를 20세기 전반까지 확장하면 중국은 1928년 난징 정부가 전국을 통일하고 관세개정에 성공했고 화폐개혁에도 성공해 정부주도의 이식형 공업화가 시작되었다. 조선은 일본의 강제점령으로 식민지가 되었는데 조선총독부의 개발 정책에 따라 일본 자본에 의한 이식형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중국에서는 20세기 전반까지  섬유공업, 특히 면공업과 잠사업을 중심으로 발달되었다. 상하이와 그 근교 도시지역에서는 공장제 수공업과 기계제 공장이 발달했고 농촌에서는 주로 선대제 가내공업이 발달했다. 이를 시장으로 이식형 방적공장이 지방도시에 나타났다 이는 일본의 20세기 초 변화와 비슷한데 그 과정이 조금 늦게 나타났다. 일본보다 불리한 조건의 강남에서는 조금 늦게 일본과 비슷한 재래적 공업화가 이루어졌다.
  조선에서는 농가부업으로 재래 면공업이 광범위했지만 이는 농가 가내공업이었고 선대제 가내공업으로 이러지지는 못했다. 1930년대에도 조선인이 경영하는 기계제 면직공장은 매우 적었고 조선에서는 재래적 공업화가 거의 없었다. 다만 조선인이 경영하는 중소공장은 발전해 일본인 경영 중소공장을 앞지르게 되었다. 이러한 공장들은 식민지기 새로이 성립되었는데 이러한 발전을 이루게 된 바탕에는 조선이 소농사회를 거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까지 살피면 재래형 공업화는 3국 중 일본만이 이루었으나 20세기 전반 중국에서 광범위하게 발전했고 조선에서는 중소공업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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