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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대 여진 정벌의 성격

정신분열초기/역사자료저장소

by 에이구몬 2018. 10. 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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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대 여진 정벌의 성격






  1. 머리말

  2. 12세기 고려의 여진 정벌

  3. 15세기 태종대 여진인식의 변화

  4. 여진 정벌의 군사적 전략과 규모

  5. 역사적 의의






  1. 머리말

한국사에서 여진 정벌에 대한 연구는 고려 숙,예종대의 여진 정벌에 그 초점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계 일부에서는 조선 초기의 여진 정벌에 대해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조선 초기의 여진 정벌은 고려대에 비해 지속적으로 병력이 동원되었음에도 그 관심도가 고려대에 비해서 현저히 적다. 또한 고려대의 여진 정벌과 조선대의 여진 정벌에 대한 각각의 논문이 있을 뿐 이에 대한 비교 연구가 전무한 상황이다. 이에 부족하나마 조선의 여진 정벌을 기반으로 여진 정벌이 가지는 의미를 서술하고자 한다. 12세기 초반 고려의 정벌과 15세기의 조선의 정벌은 3세기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진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여진 정벌이 어떠한 의도에서 이루어졌으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여진에 대한 조선의 인식 또한 살펴봄으로써 조선의 북방 대응력을 살펴본다.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유목민족들은 그들의 우수한 기동성을 이용하여 조선의 국경을 침략하였는데 이에 대한 조선의 대응책은 이들을 회유하고 방어시설을 보수하는것이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는 강경책으로 군사적인 정벌을 단행하였는데 고려시대에 한 한번의 정벌군을 편성, 파견한 것에 비해 조선시대는 태종때부터 선조대까지 약 200년에 걸친 장기간의 정벌전을 감행한다. 이는 여진세력의 결집을 방해하면서 조선의 영향력을 여진 내부에 강화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벌 과정들 중 정벌이 처음 시작되었고 여진과의 관계가 급변하는  태종대에 한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본 연구에서는 여진이라는 세력 뿐  아니라 조선의 여진인식과 당시의 군사적 편제와 활용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여진 정벌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이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1. 12세기 고려의 여진 정벌

조선의 여진 정벌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먼저 고려의 여진 정벌을 살펴보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1107년 (예종 2년)에 발발한 고려의 여진 정벌은 조선의 여진 정벌과 약 300여년의 시간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여진이라는 동일한 부족을 상대로 하면서 고려가 습득한 여진군에 대한 대항법등을 조선군에게 남겼다. 따라서 고려군이 어떠한 전략과 편제로 여진을 상대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조선의 여진 정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될것이다.   

외교적인 관례에 있어서 대외적으로 고려는 여진족에 대하여 은위병용 정책을 통해서 고려에게 의탁하거나 귀순하려는 여진족은 회유를 하고, 고려의 변경을 침탈하는 여진족에게는 무력을 사용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고려의 두가지 정책중 특이한 것은 은혜를 베푸는 부분이다. 고려는 민호에 편입시킨 여진족들에게는 고려 내지로 이동시켜서 분산시켜 살게하거나 변방에 공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이들은 자원을 통해 고려의 군인이 되어서 변방의 방위임무를 맡거나 특수한 기술이 있는자는 공인으로 살게 했다. 또한 귀순해 오는 여진의 부족장들에게는 지위와 세력을 가려서 관작을 수여하였다. 이렇게 여진족에 대한 고려의 후한 정책이 이어지자 문종대에는 여진의 세력들이 앞다투어서 고려에 복속하기를 원했다.


“동북 변강 15개 주 바깥에 있는 번인(蕃人)들이 계속 귀순하여 와서 군, 현을 설치하여 달라는 요청이 지금까지도 들어오고 있으니 이것은 실로 우리 조상들이 그들을 감화시켰던 덕택이다. 재상들로 하여금 종묘 사직에 이 사유를 먼저 고하게 하고 원근 번인들이 완전히 귀순하기를 기다려서 주, 현들을 획정한 뒤에는 종묘와 사직에 내가 친히 감사를 드리려고 한다.”


여진족은 고려를 통해서 선진문물을 얻고 고려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안정적인 생활을 하려는 것이었고, 고려는 귀순해 오는 여진족들을 편입시켜서 그들로써 고려의 변방을 지키는 울타리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중 완안부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 일대에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완안부는 계속 세력을 확장시켜서 숙종8년(1103)에는 고려 정부와 함흥평야의 관할권 문제로 고려 정부와 무력충돌을 일으키고 고려로 귀순하는 여진족들을 기병으로 쫒아 국경에까지 출몰하면서 고려는 대책을 고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인 목적 이외에도 대내적으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으로 인해 실추된 왕조의 위신을 회복하고 사회경제적인 혁신을 이룬 부국강병책을  채택한다. 이를 숙종의 신법이라고하는데 같은 시기 송나라의 왕언석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 세력이 추진한 정책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때 숙종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대부분의 문벌귀족은 소외되는데 숙종은 거란이 쇠퇴하고 국제질서의 균형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다 이를 기회로 삼아 고려를 강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고 그렇게 하기 위해 문벌귀족을 견제한것이다. 화폐의 주조와 유통을 통해 국가가 문벌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려 했으며, 수도 천도를 단행해 문벌귀족의 근거지를 와해하고자 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의도가 자신들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벌귀족들은 숙종의 정국방향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계층적 이해관계에 따라 문벌귀족의 불만이 커져가고 당시 광범위 하게 일어나던 농민의 저항이 거세지자 결국 고려의 정책은 여진 정벌이라는 강경책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여진의 군사력을 얕봤던 고려는 첫 전투인 정주성 전투에서 패배를 하게 된다. 고려정부는 정주성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을 창설한다. 별무반은 기존에 보병이 주력인 고려군의 병력구성을 개선하고자 만들어진 만큼 신기군이라는 기병과 특수 보병인 신보군, 도끼부대인 도탕군, 궁수부대 경궁군과 정노군, 그리고 승군인 항마군이 있었다. 별무반을 설치한 목적이 여진 기병의 격파에 있었기 때문에 신기군의 역할은 매우 컸다. 그러나 신기군은 특수군의 지원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여진 기마전에서 기병 외 병종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별무반으로 군세를 크게 확장한 고려군은 여진에 대하여 공격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된다. 별무반으로 재편성 된 고려군은 약 17만명 이였으며, 당시 약 3만으로 추정되는 여진군을 숫자로 압박하는 대군 압박전략을 펼쳤다. 정주성 근처의 소규모 여진부락을 정리한 고려군은 여진군의 5배에 달하는 병력을 기반으로 공격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고려군은 신기군을 이용한 평탄지형에서의 적극적인 공격전술을 세웠다. 고려의 전에 없던 공격적인 전술에 여진은 평탄지대를 버리고 수성을 택하였다.


윤관이 대내파지촌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니, 여진이 우리 군사의 기세가 매우 성함을 보고 모두 도망하여 달아나고 오직 축산만 들에 깔려있었다. 문내니촌에 이르니 적이 동음성에 들어가 방비하였다.


기사에서 나타나듯 여진의 기병은 압도적인 수의 고려군에게 밀려 수성을 택하게 된다. 고려의 신기군은 수성전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데 여진군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일시에 기병을 출격시키는 전법으로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기도 하였다.이러한 고려군의 기병을 주축으로 한 전략은 윤관의 명령으로 9성을 축조하면서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고려 정벌군은 예종2년(1107) 2월에 영주성, 웅주성, 복주성, 길주성을 쌓았다. 그리고 1년 뒤에는 함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고 그 다음달에 의주, 통태진, 평융진에 3개 성을 쌓아서 동북 9성을 완성하고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완벽하게 점령후 영토화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다. 이에 윤관은 이 9성을 지키기 위해 17만의 병력을 대부분 9성에 남겨 방어 하였다. 9성 축조 이후 고려군의 전술이 공세에서 수성으로 극적으로 변화하였다. 고려군이 함주~공험진에 이르는 여진의 곡창지대에 9성을 축조하자 생존에 위협을 받은 여진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고려가 9성을 축조하고 그곳으로 주민을 이주시켜 영토화를 하는 과정에서도 여진의 반격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1107년 윤관의 군사작전이 성공한 이유는 대군의 기습작전에 의해서 였지만 확보한 영토를 유지하고 영토화 하는 과정에는 새로운 차원의 전략이 필요했다. 당시 여진족의 실력자 아골타는 ‘9성이 축조되는 지역을 되찾지 못하면 다른 여러 부족 도 잃게 될 위험이 있다’라는 명분으로 여진족을 이끌고 반격을 가해왔다. 여진의 상황에서는 9성이 축조됨에 따라 농경지를 빼앗겼으므로 강력하게 반발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여진의 공격에 고려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전과없이 후퇴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윤관과 오연총, 임언 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떠올랐다. 완완부 여진 역시도 세력 규합이 필요할때에 고려와의 계속적인 전투는 부족의 기반이 약화될수 있음을 알고 또한 거란세력을 무시할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와 일시적인 화해가 필요했다.

윤관의 주선으로 1109년 6월 여진의 사자 요불이 개경으로 들어와 강화와 함께 동북9성의 반환을 요청하였다.


“우리들은 고려조정의 수호 윤허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고 계속해 왔는데, 작년에 뜻밖에 고려의 대군이 들어와우리 늙은이와 어린이를 죽이고 9성을 쌓는 바람에 그곳에 남은 우리 백성들이 돌아가 살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태사 영가 께서 저를 보내  고려조정에 우리 옛 영토를 돌려줄 것을 청하도록 했습니다. 부디 저희를 가엾게 여겨 9성을 돌려주도록 윤허하여 우리들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들은 세세손손이 정성껏 조공을 고려에 바칠 것을 하늘에 맹세합니다.”


이에 예종은 신료들과의 논의를 통해서 여진과 강화를 맺고 동북9성을 반환할것을 결정하였다. 1109년 7월 3일 예종은 여진의 사자를 불러 9성의 반환을 통보했다.

그렇다면 고려는 왜 이렇게 쉽게 동북9성을 내주었을까. 여기에는 여진에게는 외교전략상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 숨어있다. 당시 고려 조정은 고려가 확보한 9성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기 어렵다는 전략상의 난점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었다.


첫째. 신흥 완완부의 군사력이 미약하다고 판단했으나 9성을 축성한 이후 여진족의 반격이 날로 강화되고 있다.

둘째. 장기 소모전을 계속할 경우 고려의 피해는 더욱 가중될 것이다.

셋째. 주요 도로의 장악만으로 동북9성지역의 군사통제가 가능할 것이라는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넷째. 9성의 확보 유지를 위해 산골 험준한 지역까지의 병참선이확보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려측의 물적 인적 손실이 엄청날것이다.

다섯째. 산악지역에서 매복 기습전을 계속하는 여진족을 소탕하기는 어렵다.


이런 고심 속에서 고려 조정은 9성을 환부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고려의 여진 정벌은 막을 내리게 된다. 9성을 환부하면서 여진과의 화친을 도모하게 된다. 더불어 고려 조정은 여진 정벌의 책임자였던 윤관을 패전지장(敗戰之將) 의 죄로 파면시킨다.

  1. 15세기 태종대 여진인식의 변화


조선 건국 직후부터 조선은 여진과 아주 각별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으로 이 지역은 고려시대 부터 여진인이 산거하던 곳 이었다. 이성계의 고조 이안사가 이 지역의 천호로 있었고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총관부의 관리로 일했기 때문에 이성계 가문은 이 지역의 여진인과 매우 친밀 하였다. 또한 이성계는 그 지역 특유의 사회구조를 적절히 활용하여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성계는 여진인이 포함된 군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정부의 왜구소탕에 참가함으로써 확고한 정치적 입지를 닦을 수 있었으며 이는 곧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조선의 건국에 이지란과 같은 여진출신 수하들의 공이 컸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태조는 여진에 대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하였다. 이는 세대를 넘겨 태종대에도 여진과 우호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태종 전반기의 대여진 인식은 여진인은 조선인의 영향력하에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명의 영락제가 동북면의 여진인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여진에 취한 행동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403년 영락제가 여진인들을 회유하려하자 이에 조선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조정에서 의논을 하였다. 당시 조선은 상국으로써 여진 내부의 영향력을 장악하려 했고 명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명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대를 기본원칙으로 했지만 사대의 원칙과 국익우선의 원칙이 충돌할때에는 국익을 우선시하였다. 사대명분을 따르는것이 국가의 이익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사대하지 않았다는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명을 완전히 신뢰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은 명이 동북면에 대해서 정벌을 할 것을 걱정하였다. 조선에 대한 불신은 명도 마찬가지여서 명 역시 조선이 자신들의 경쟁세력과 연대하여 자신들을 적대시 할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명이 여진 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했던 시기는 영락제의 집권기였다. 당시 명은

오이라트와 북원의 잔존세력과 전쟁을 하고있었고 이 영향이 만주 지역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명의 영락제는 즉위 초기부터 여진지역에 본격적인 영향력 확대를 준비한다. 영락제는 이 여진세력을 명의 위소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명의 입장에 조선은 명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것을 예상한다.


영춘 추관사 하윤, 지춘추관사 권근에게 명하여 사고를 열고 전조

『예종실록』에서 예종조 시중 윤관이 동여진을 공격하고 경계 위에 비석을 세웠던 일을 강고 하게 했다. 황제가 왕가인을 여진에 보내어 건주위를 설치하려고 했기 때문에  대응하고자 한 것 이다.


기사에서 태종은 고려『예종실록』의 기록을 확인하여 윤관이 동여진을 정벌했던 상황과 그가 세웠던 선춘령비에 관한 내용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태종의 지시는 명이 여진지역에 건주위를 설치하는 일에 대한 대응을 위한 조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당시 명의 건주위 설치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는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진지역의 주도권 문제를 두고 명과 대립할 수 있는 상황을 대비했다고도 볼 수 있다.  두 나라 모두 각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여진 세력에 대해서 영향력을 확대하여 국경에서의 소요를 자국에 유리하게 이끌려는 계획이었다. 조선에서는 정벌에 앞서 회의를 통해 의견을 모았는데, 이때 회의 참가자들은 회유 대상인 여진이 원래 조선에 속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진을 조선의 ‘변방의 울타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영락제의 경제적 회유에 응한 여진이 나타난 1405년을 기점으로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된다. 명에 입조한 여진이 나타나자 동북면의 지배권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은 여진과의 무역소를 폐지하여 여진에 대해서 경제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러자 1406년 김문래 등이 생활의 직접적인 곤궁을 이유로 경원을 침략해오자 태조대부터 우호적이던 여진관계는 침략과 방어라는 관계로 급히 전환되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이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이전과 달리 여진인들을 불신하며 이들을 도적으로 보는 인식이 생겨 났고 이는 제 1차 여진 정벌을 통해서 심화되었다.

1406년 여진이 경제적 곤궁을 이유로 조선을 침략하게 된 이후로 조선에서는 국경선에 대한 감시를 공고히 하고 이전과 달리 여진인들에게 경계를 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여진을 부르는 용어에서도 나타나는데 태종은 제 1차 여진 정벌 직후에 유정현을 동북면 도선무처치사로 삼고  부월과 함께 낼니 교서에서 여진인을 ‘소추’(小醜) 라고 불렀다. 소추는 주변의 오랑캐를 멸시하여 부르는 용어로 이후 실록에서 여진을 부를 때 사용되었다. 이를 토대로 여진족에 대한 조선의 인식이 악화 되어감을 알 수 있다. 물론 1차 여진 정벌 이후 여진과의 관계가 계속해서 나빴던 것은 아니다.  1410년에 1차 여진 정벌에 대한 여진의 보복성 침입이 있은 후 12년 동안은 여진의 침입이 없었다. 이 시기 조선 또한 여진에 대한 회유책도 병행했기에  여진인이 조선에 내조하는 사례가 크제 증가하는 등 1차 여진 정벌을 통해 조선의 동북면 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태종대의 여진관계는 조선과 명, 그리고 여진의 삼각 관계 속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명의 적극적인 여진 회유 정책은 여진을 신하의 나라로 생각하던 조선에게 있어 커다란 분란요소로 작용하였다. 명의 회유정책에 동조한 여진인들로 인해 조선과 여진은 원만하던 관계가 악화 되었고  결국 1410년의 조선의 여진 정벌이라는 군사적 대립을 불러왔다. 또한 ‘소추’와 같이 부정적 표현등을 낳기도 했으나 조선은 정벌이후 동북면에 대한 일단의 영향력을 회복하면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한동안 보이지 않게 된다.

애초에 태조를 통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과는 달리 고려는 지속적으로 여진과 전투를 해왔다. 숙종대의 여진 정벌 직전인 11세기 까지도 여진족은 부족을 기본 단위로하는 유목 민족이었다. 그러므로 병종은 주로 기마병이였지만 기본적으로 전술적인 행동을 보일 만큼의 군대는 아니였다. 따라서 고려군은 약탈을 하러 국경을 넘은 여진족을 격퇴할때에는 선봉 정찰대의 정보를 토대로 군사를 매복하거나, 적의 퇴로에 대기하였다가 기습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완안부의 추장 유야소가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지휘체계를 확립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병을 위주로한 기동전에 능숙해졌으며 보병 위주의 고려군을 상대하기 쉬운 기병을 집중적으로 양성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여진의 내부적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종래대로의 인식에 따라 여진을 과소평가하였다. 곧 여진에 대한 과소평가는 정주성 전투라는 커다란 패배로 이어지게 된다.


2월에 임간이 여진과 정주성 밖에서 싸워 대패하였다. 처음에 내 시 임언이 출병의 논의를 주장하였다. 직사관 이영이 말하기를, “무기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니, 망동함이 옳지않다. 그런데 임언이 무사할때 군사를 일으켜 틈을 내려함은 심히 불가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듣지 않았다. 임간이 공을 세우려고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급히 나가 싸워 패전하여 대부분이 죽었다.


이여진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크게 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가 말해 주듯 고려군은 여진군을 과소평가  기사는 동북면 병마사 임간이 여진군을 과소평가하고 훈련되지 않은 고려군을 이끌고 했기에 고려군을 험지에서 평지로 이끌어 내려는 여진군 선봉의 유인책에 말려들고 말았고 이는 곧 대패로 이어지게 된다. 임간의 패배 이전까지의 고려의 여진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의 경우 태조대 여진 우대 정책으로 그 관계가 원만했으며 툰두란, 이지란이라는 조선과 여진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그러나 태종대에 들어 명과의 삼각관계로 인해 이러한 관계는 금이 가게 된다. 이어지는 여진의 약탈은 곧 여진 정벌이라는 강경책을 부르게 된다. 고려 역시 여진의 약탈에 대한 강경책으로 정벌을 단행한다. 두 개의 사건 모두 여진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여진에 대해서 공격을 하는데 고려와 조선은 그 목적에서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인다. 조선의 경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진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상국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고자함이었다. 특히 명에 입조하는 여진부족을 적대시 하여 동북면에 대한 조선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 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경우 여진의 침략이 원인이기도 했으나 고려 내부의 정세에 정벌의 원인이 있다 하겠다. 이를 숙종의 신법이라고하는데 같은 시기 송나라의 왕언석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 세력이 추진한 정책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때 숙종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대부분의 문벌귀족은 소외되는데 숙종은 거란이 쇠퇴하고 국제질서의 균형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다 이를 기회로 삼아 고려를 강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고 그렇게 하기 위해 문벌귀족을 견제한것이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여진 정벌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조선과 일견 대비되는 면이 있다.




  1. 여진 정벌의 군사적 전략과 규모


조선은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어서 해양세력에 의한 접근이 용이해 이에 대한 방어상의 난점이 있었다. 그러나 해양세력은 구심점이 없는 소수 집단인 왜구에 불과했으므로 국가 안보상황과는 직결되지 않았다. 또한 조선 건국 초기에 이미 해금정책을 내세워 해양세력의 접근을 차단했으므로 국방의 부담을 줄였다. 이 결과로 조선은 육지로 연결된 북방 국경선에만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북방은 육지로 연결되어 북방 유목민의 접근이 쉬웠으며 유목 민족들은 특유의 기동성을 발휘하여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에 대한 조선의 대응책은 거점 방어 형태의 축성과 이들을 회유하는 회유책등으로 주로 사용되었는데 여진인들 일부가 명에 입조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조선은 여진에 대한 강경책으로 여진 정벌을 감행한다.

조선의 군사적 전략과 규모를 살펴보기 전에 조선 이전에 여진을 상대했던 고려를 살펴 보아야한다. 조선의 군사적 전략과 규모는 고려의 여진 정벌을 보고 전략상 유리한 점 만을 게승해 실행되었기 때문인다.

12세기의 고려는 완완부에 의해 통합된 여진의 군사력을 과소평가 하였다. 고려군은 종래대로의 약체였던 여진군을 상대하듯이 첫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정주성 전투이다.


2월에 임간이 여진과 정주성 밖에서 싸워 대패하였다. 처음에 내시 임언이 출병의 논의를 주장하였다. 직사관 이영이 말하기를, “무기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니, 망동함이 옳지않다. 그런데 임언이 무사할때 군사를 일으켜 틈을 내려함은 심히 불가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듣지 않았다. 임간이 공을 세우려고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급히 나가 싸워 패전하여 대부분이 죽었다.


기사는 동북면 병마사 임간이 여진군을 과소평가하고 훈련되지 않은 고려군을 이끌고 했기에 고려군을 험지에서 평지로 이끌어 내려는 여진군 선봉의 유인책에 말려들고 말았고 이는 곧 고려군의 패배로 이어지게 된다. 임간의 패배 이전까지의 고려의 여진군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임간의 정주성 전투 패배이후 임간은 곧 동북병마사에서 파직되고 윤관으로 하여금 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윤관은 완안부에 의해 통합된 여진의 힘을 꿰뚫어 보고 고려정부에 건의하여 별무반을 창설하고 여진의 기병에 대항할 고려의 기병을 길러낸다. 통합된 여진은 강한 기병을 가지고 있었고 고려군의 주력인 보병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군 총사령관 윤관은 고려군의 주력인 보병만으로는 기병이 주력인 여진을 상대하는데 불리하다고 판단한다.

고려정부는 정주성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을 창설한다. 별무반은 기존에 보병이 주력인 고려군의 병력구성을 개선하고자 만들어진 만큼 신기군이라는 기병과 특수 보병인 신보군, 도끼부대인 도탕군, 궁수부대 경궁군과 정노군, 그리고 승군인 항마군이 있었다. 별무반을 설치한 목적이 여진 기병의 격파에 있었기 때문에 신기군의 역할은 매우 컸다. 그러나 신기군은 특수군의 지원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여진 기마전에서 기병 외 병종의 역활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별무반으로 군세를 크게 확장한 고려군은 여진에 대하여 공격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된다.

조선은 고려의 과거 행동을 학습하여 처음부터 기병을 주축으로 정벌전을 펼쳤다. 조선은 200년간 15차례에 걸쳐 여진을 정벌 했으므로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태종대의 1차 정벌과 초반의 정벌 일수록 기병을 주축으로 하여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특히 1차 정벌은 보병은 전혀 편제하지 않고 오로지 기병만으로 편제한 정벌군을 편성하는등 기병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조선의 여진 정벌의 성격이 대규모 점령전이 아닌 일시적 섬멸전에 국한된다는 의미이다. 명이 여진에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이 여진의 영토에 무리하게 진입해 점령한다면 자칫 명과 여진의 연합군을 상대할 상황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제정세상의 이유로 조선의 여진 정벌군은 빠른시간안에 여진의 수뇌부만을 격파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소수정예의 기병만을 뽑아 섬멸전을 펼친 것은 당시로서 조선이 택할 수 있는 최상의 수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소수에 의한 기동전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을 수 없었고 이는 여진 정벌군의 작전 일수가 짧아지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태종대의 여진 정벌은 단 한차례만이 존재 했으나 이후의 모든 정벌전은 태종대의 정벌을 비슷하게 따라간다. 병력의 크고 작음은 있으나 기병을 필두로 한 기습전이라는 점과 짧은 작전기한이라는 유사성을 보인다. 이는 태종대의 조선의 1차 정벌군이 차후에 있을 여진 정벌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조선의 1차 여진 정벌은 1410년(태종 10)에 일어났다.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은 여진의 한 갈래인 혐진 우디케가 1406년 뗴를 지어 경원과 종성지역에 침입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조선은 여진에 대해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는데 1409년과 1410년에도 여진세력이 연합하여 경원부에 침입하여 병마사 한흥보를 살해한것이 원인이 되어 여진을 응징하고자 1차 여진 정벌이 나타났다.

태종은 정벌을 위해 정벌군을 편성하면서 보병을 동언하지않고 북청 이북지방의 기병 1,150명을 동원하였다. 단기적 섬멸전에 중점을 두고 편성한 편제이니 만큼 이들의 작전일수는 한 1일에 그쳤다. 정벌군은 1410년 2월 29일 길주를 출발하여 3월 6일 회령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9일에 곧바로 두만강을 건너 토문에 도착하였다. 정벌군은 애초에 응징하고자 했던 우디케 여진이  숨어버리자 모련위 지역으로 들어가서 정벌대상을 모련위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미 모련위는 경원부에 침입하고난 이후 토문으로 들어가 방어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오로지 기병으로만 편성된 조선의 정벌군으로서는 정면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유인작전으로 추장 4명을 포함한 8명의 여진군 지휘부를 제거하였다. 적장을 제거한 후 조선군은 단 1일간의 작전으로 여진인 160여 명을 제거하고 27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정벌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한 원인은 첫째로 조선 기병의 동원에 의한 단기적인 기습작전의 효과 때문이다. 이는 기습에 중요한 기동성을 살린 태종의 기병 위주의 편성이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기병 편제는 고려로부터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고려가 정주성 전투의 패배를 경험으로 삼아 기병을 주력으로 한 별무반을 창설 했다면 조선은 고려의 과거 행동을 학습하여 처음부터 기병을 주축으로 정벌전을 펼쳤다. 또한 동북 지방에 대해 이해가 높고 여진족의 생활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태조, 태종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전략이 잘 맞아 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전략적 측면에 있어서도 조선의 방식은 고려의 방식과 닮아있다. 명나라로 인하여 대군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소수 정예의 섬멸군으로 기습한 조선과 비록 그 규모는 다르나 기습적인 행보를 보였던 고려의 여진 정벌군은 모두 ‘기습’이라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두 정벌군이 모두 기습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한 이유에는 여진이라는 적이 특수한 적이라는 점에 있다. 여진은 부족을 단위로하는 유목집단으로서 반 유목적 생활을 하던 유목 민족이었다. 이들은 부족에 따라 차이가 나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부족단위의 이동이 용이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였다. 따라서 기습이 아니라면 이들은 정벌군을 피해 타 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 이들 또한 정찰병을 운용하였으므로 군대가 움직이는 것을 관찰 했다면 부족 단위로 이동을 하여 싸움 자체를 회피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 제 1차 여진 정벌때 조선이 애초에 섬멸하고자 목표했던 부족은 우디케인데 이들은 정벌군이 움직이는것을 확인한 후 부족 단위의 이동이 이루어져 두만강을 넘어 공격한 조선군은 그들의 소재를 찾을 수 없었던 일이 있었다. 따라서 기습작전이 아니면 여진의 본거지 소탕이 어려울것이라는 판단하에 조선과 고려 정벌군 모두 기습을 선택하였다. 두번째로는 이들 여진족이 세력을 규합할 경우 상당한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여진을 비롯한 군소 부족들이 세력을 영위하던 만주 일대는 부족이라는 단위로 흩어져 있을 뿐 그곳의 인구는 상당했다. 이는 고려의 여진 정벌에서 나타나는데 여진 정벌에 대항하기 위해 여진은 완완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했고 그 수는 3만에 가까웠다. 조선은 고려처럼 대규모 병력을 훈련시키지 않고 점령전이 아닌 섬멸전을 목표에 두었으므로 앞서 말한 여진의 세력 규합 이전에 정벌군을 두만강 너머로 투입시킬 수 있었다. 또한 중앙의 군사가 아닌 북청 이북지방의 군사를 이용하므로써 병력의 이동을 최소화 했다는 점 역시도 여진의 정보망에 군인들의 이동을 들키지 않으려고 한 노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번째로는 여진이 정벌군에 대한 대응책으로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할 시간을 주지 않는것이 목적이었다. 조선과 여진의 관계가 소원하진 것은 태종대에 들어서 명이 여진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부터이다. 조선이 여진을 정벌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명에 입조한 여진부족에 대한 경제적 대응으로부터 나오게 된 여진의 약탈행위인데, 이러한 국제 관계속에서 만일 여진이 완전히 조선을 등지고 명과 접촉하게 된다면 조선으로서는 정벌의 명분을 잃게되는것 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여진이 명에 연락할 시간조차 주어서는 안될만큼 급박하게 정벌군을 보내야만 했다고 판단한다. 명과 여진이 손을 잡게 된다면 여진의 상국이던 조선의 위치는 같은 조공국의 위치가 되며 여진의 지위가 한층 격상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기습을 통해서 여진의 지휘부를 제거하고 상국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려 또한 당대 급박하게 돌아가던 국제 정세 속에서 여진을 정벌 하면서 거란, 송, 여진 이라는 국제적 외교관계에 긴밀히 반응하였다. 당시 여진은 고려와 거란, 두 나라 모두를 적으로 두고 있었는데 고려의 기습적인 정벌로 인하여 거란과의 전쟁은 종식시키지 못한 채 두 개의 전선을 가지게 된다. 이는 하나의 전선에 집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고려와의 협의를 통해서 9성 환부가 있을때 까지 여진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려의 기습은 여진에게 있어 거란과의 외교관계를 다시 이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고 이루어 진 것이여서 여진의 타격이 컸다.

조선의 제 1차 여진 정벌은 소수 정예의 기병으로 이루어졌으며 점령전이 아닌 섬멸전, 정확히는 여진부족의 수뇌부만을 노렸다. 이를 위해 기습을 주요 전략으로 설정 했으며 적진에서의 작전시간은 아주 짧은 시간에 한정하였다. 이는 당시의 상황을 잘 분석한 최상의 선택이였다. 고려와 조선은 모두 기습이라는 전략의 형태를 선택했지만 그 성격이나 목적은 상이했다.



  1. 역사적 성격


태종대 조선의 여진 정벌은 조선의 북방경계선에 대한 안정과 여진에 대한 영향력 확대라는 점에서 조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였다. 정벌의 결과적 측면에 있어서도 고려가 여진 정벌을 통해서 얻은 9성을 환수 하고 여진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여 보주를 얻었듯이 조선의 여진 정벌 또한 여진에 대한 조선의 영향력 확대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결과는 세종의 여진 정벌의 성공적인 시행으로 이어지고 곧 4군 6진 개척의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태종대의 여진 정벌이 고려때의 9성 축조와 같은 점령 전략과는 달리 점령을 염두에 둔 전략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있을 영토 점령에 있어 정벌의 대상이 된 부족의 활동 지역의 확고한 우위를 점유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고려의 여진 정벌이 패전이라는 이름 아래 잊혀진 것과 달리 태종의 여진 정벌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었다. 여진에 대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상국의 위치를 공고히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태종이 여진 정벌을 단행한 이후로 12년간 여진으로부터의 침략이 없었던 것 또한 여진 정벌이 성공적이였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태종의 전략은 곧 조선 북방 방위의 교과서처럼 여겨지며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여진 정벌에 영향을 주었는데, 세종대에 제 2 차 정벌전 또한 태종의 전략을 기본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태종대의 기병 위주의 편제와 기습을 채택한 세종의 2차 정벌군은 성공적으로 정벌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세종의 여진 정벌은 4군 6진 개척의 직접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고려 예종때 보주를 획득하게되면서 압록강 유역의 땅을 확보하여 백두산 서쪽 지역, 즉 지금의 평안도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이 4군과 6진을 개척하며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내세우게 되었다. 지금의 함경도는 이때에 영역이 완성되었고 현재 중국과의 국경선이 되는 두만강 유역의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태종대 여진 정벌은 4군 6진을 개척하는데 있어서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오늘날의 중국과의 두만강을 따라 경게를 나눈 국경선을 확정하는데 큰 기여를 한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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