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창안과 여성의 국민화
- 신사임당을 중심으로 -
본 논문은 신사임당에 대한 담론이 시대에 어떻게 따라 바뀌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시대적 담론에 따라 어떻게 신사임당이라는 인물을 해석하는지 살펴보자. 논문에 따르면 사임당에 대한 담론은 크게 3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1900년대 애국계몽 문화운동 세력에 의한 해석
애국계몽세력은 개화와 국권박탈의 위기에서 역사위인과 국가영웅을 발굴하고 전기소설을 출시하였다. 그들은 여성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공론화 하였다. 근대적 출판물에 신사임당이 처음으로 나타난것은 장지연의 <여자독본>(1908)이다. <여자독본>에서는 모성을 국가에 연결시키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여학교들이 가르치던 <여자소학수신서>와의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여성은 시가의 친족 체계속에서 여성의 역할로 정의된다. 이에 비해 <여자독본>은 유교적 열녀를 취급하지 않았다.
1940년대 초 일제에 의한 해석
일제는 194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 지원병과 징병제를 실시하며 조선 여성들에게 국가주의적 양처현모 이념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여성에게 교육하던 ‘군국의 어머니’를 조선의 여성들에게도 강요하기 시작했다. 45년 연극 <신사임당>을 통해 조선에서도 군국의 어머니를 이끌어 내려했다. 이 극은 창작의도에서 밝혔듯 ‘충을 간직한 강인한 어머니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징병제가 요구하는 군국의 어머니론을 조선의 여성들에게 신사임당을 매개로 하여 설파하고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한 해석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체성 창안의 과정속에서 율곡기념사업이 시작되었다. 율곡에 관련된 사적과 유적은 1962년 오죽선 수보를 시작으로 진행되었다. 율곡을 기념하며 신사임당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다. 사임당이 한국 여성의 표준으로 기념되고 계승할 위인으로 만들어진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박정희 정권은 사임당교육원을 갖추고 학생들을 교육했다. 이 교육원에서는 애국애족의 역군으로 여학생들을 가르치고, 인이예지신 이라는 성리학의 오덕 중 인과 의를 충과 효로 바꾸므로서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였다.
또한 국가가 아닌 여성운동에서도 신사임당의 담론이 있었다. 대한주부클럽연합회는 김활란 박사를 중심으로 1966년 결성된 단체이다. 김활란 박사는 근대화 된 주부, 가정을 지키는 여성, 봉사자의 여성이 바람직한 여성이라고 주장하였다. 김활란이 주장한 핵심은 “초여인”이었다. 하지만 신사임당이 그러했던 것처럼 초여인은 현실에 존재하기 힘들었다.
<문제제기>
논문 9p. 현모로서의 근거로 2가지가 제시됨. 첫째는 사임당이라는 호가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받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는 점, 그리고 율곡을 비롯하여 4남 3녀의 자녀가 훌륭하게 컸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녀의 호만으로 사임당이 교육을 했고, 또 교육이 잘 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
▶4남 3녀가 훌륭하게 컸다는 점은 결과론적인 해석.
저자 역시도 사임당이 4남 3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육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임당의 교육적 부분에 대한 담론을 위해서라도 이 부분은 좀 더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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