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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이반 4세 뇌제와 러시아 차르국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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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9. 2. 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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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4세 뇌제와 러시아 차르국의 등장


러시아를 민족국가로 끌어올린 바실리 3세는 자신의 후계자인 이반 4세가 겨우 3살인 1533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바실리 3세는 러시아의 통치를 자신의 아내인 옐러나와 보야르 두마에게 맡겼다. 새로운 섭정인 옐레나는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당하는 1538년까지 자신의 숙부인 글린스키공과 자신의 정부에게 의지해서 정치를 했다. 그녀가 죽은 이후 8살인 이반 4세를 대신하여 보야르들이 정치를 대신 맡아 진행하였다.

▲ 이반 뇌제 (이반 4세)


두 군주가문인 슈이스키와 벨스키 가문이 섭정 자리를 두고 경쟁하면서 러시아에서는 투옥과 망명, 처형과 살인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렇게 정치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반 4세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고 일을 처리하였다. 이반 4세가 열세살이 되던 해 슈이스키가문의 안드레이를 숙청하고 이반은 군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되찾았다.


16세가 되던 1547년 이반 4세는 러시아의 차르로서 대관식을 진행한다. 차르라는 단어는 조부인 이반3세와 부친인 바실리 3세도 사용하였으나 이 명칭을 사용하여 대관식이라는 의식을 치른것은 이반 4세가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대공국에서 차르국으로의 변화를 겪게 되고 이반 4세는 정치적 혼란기를 평정하고 새로운 러시아의 전제군주인 차르로 등극하였다.

그는 이반 뇌제라 불리며 러시아의 공포의 군주로 불리지만 이는 사실과 조금 다르다. 그의 통치는 러시아를 부흥으로 이끌었고 대외적 팽창에 있어서도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대관식에 이어 같은해 이반 4세는 보야르 가문들중 유력가문인 로마노프가문의 아나스타샤와 결혼하였다. 이후 이반의 통치는 비교적 훌륭하게 러시아 차르국의 기반을 닦아두었다. 젊은 차르는 유능하고 유럽의 선진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인 조언자들과 함께 국가의 미래를 설계했는데 이 들 집단을 특선평의회로 명명하였다. 또한 1549년에는 다른 유럽국가의 신분 대표자들의 모임을 본따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된 러시아의 정치를 유럽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하였다. 이들은 유럽세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에서 차르를 도와 국가를 번영시킬 전문가들을 초빙했다. 독일에서 120명 이상의 의사, 교사, 예술가등 기술자들이 이 초청에 응했으나 러시아와 적대적이던 리보니아 기사단과 한자동맹이 그들을 통과시키지 않아 소수만이 러시아에 도착하였다. 또한 잉글랜드 선장 챈슬러가 북극해를 통해서 1553년 러시아의 백해 해안에 도착했고 1555년에는 협정을 체결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인들은 러시아에서 큰 상업적 이익을 얻게 되었다. 북드비나 강의 아르한겔스크는 잉글랜드인들을 위한 입구가 되었고 그곳에서 잉글랜드는 도매상 대표상이 사법권을 갖고 독자적인 조직까지 유지하게 되었다. 이반 4세는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사절단을 보내고 의학과 광업분야의 몇몇 전문가를 데려오기도 하였다.


또한 이반 4세는 1550년 법전인 수데브닉을 제정하고 1551년에는 100개조항 협의회라 불리는 교회 협의회를 구성하여 교회가 더이상 차르의 허락없이 토지를 획득할 수 없도록하여 종교의 권한을 억제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군대 개혁에도 착수하였다. 남부 방어선에 대한 전개 뿐 아니라 포병과 공병을 새롭게 강화시킨 내용이 포함된 이 개혁은 러시아 최초로 정규 상비부대를 추가하였다. 이들은 소총을 소지하였다 하여 소총병이란 뜻의 스트렐치로 불렸다. 1550년대에는 이미 여러 전쟁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개혁은 매우 시기 적절했으며 이러한 일련의 개혁들에 대한 성과는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초원 스텝지대의 유목민들은 러시아를 상시적으로 또한 대규모로 약탈하였다. 이들의 대규모 습격은 전리품과 노예를 노린 침입이었고 국경이 길어진 상황이기에 러시아는 좀 더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타타르 계통의 부족들은 자신들끼리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키면서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이에 러시아는 1551년 카잔 칸국을 공격하여 정복시켰고 카잔 바로 옆에 스비야즈스크 요새를 건설하여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높였다. 또한 카잔에 대한 군사적인 작전을 감행하여 6주간의 포위 끝에 요새를 화약으로 폭파시켜 카잔을 정복했다. 이후 카잔의 전 영역을 러시아로 편입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는데 다시 5년이 걸렸다.


러시아는 볼가강 중류의 카잔을 정복한 다음 볼가 강 하구에 있는 또 다른 칸국인 아스트라한 칸국에 눈길을 돌렸다. 러시아 인들은 카잔의 영역에 대해 지배권을 확립하고 있었기에 카잔과는 다르게 1554년에 아스트라한 점령하고 간접지배 방식을 택했다. 러시아인들은 허수아비 칸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그가 크림 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자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을 완전히 러시아에 병합시켜버린다. 이리하여 킵자크 칸국의 후예인 타타르계열의 칸국은 오직 크림 칸국만 남게 된다. 크림 칸국은 러시아에 대해 선제공격을 개시하여 1554년,57년,58년 세번에 걸쳐 러시아를 침공했으나 매번 격퇴당하였고 마지막 58년 침공의 경우 러시아가 역공을 가하여 크림반도 깊숙히 러시아 군대가 침투해 들어갔다.


또한 러시아의 북서 방향의 리보니아 기사단과도 전쟁을 진행했는데 이들은 러시아가 발트해로 세력을 확장하는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1558년 전쟁을 개시하였다. 1563년까지 러시아군은 20여개의 리보니아측 성을 함락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리투아니라로부터 폴로츠크까지 뺏어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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