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3세와 러시아의 통일
△이반 3세 (1440년 1월 22일 ~ 1505년 10월 27일)
러시아를 통치하던 바실리 2세가 사망했을때 바실리 2세의 아들 이반 3세는 불과 스물 두살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반 3세는 맹인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바실리 2세의 조력자로서 종사해왔고 새로운 대공으로서 부친을 계승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있었다.
이반 3세의 통치가 시작될 무렵 모스크바의 영토는 1만 5000제곱마일에 가까웠다. 이반 칼리타 시대에 모스크바국의 영토가 600제곱마일에 불과했던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반 3세의 통치기는 모스크바국의 전성기임을 단박에 알 수있다. 그는 전임자들이 했던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땅을 모으는것을 멈추지 않았다. 1463년 야로슬라블의 분령지들을 구입했고 1474년에는 로스토프시의 나머지 절반을 구입했다. 그리고 1472년 자식이 없는 형제인 유리로부터 드미트로프 시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같은해 노브고로드의 영역인 페름땅을 정복했다. 또한 1489년에는 노브고로드의 이주민들이 건립한 북부의 국가인 뱌트카를 합병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인 안드레이 볼쇼이로부터 우글리치 시를 뺏고 그를 투옥시켰다. 또한 랴잔의 이반 공으로 부터 그의 공국 절반을 물려받았고 그 어린아들이 관리하는 절반의 랴잔시에 대해서 보호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토 넓히기의 절정은 노브고로드와 트베리 이다. 두 도시 모두 모스크바가 성장하는데 있어 계속 해서 경쟁해온 도시이며 마지막까지 모스크바에 흡수되지 않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노브고로드는 힘에서 모스크바국에 밀렸고 노브고로드 내부에서도 단합이 되지 못하여 모스크바에 대항하지 못했다. 이반 3세는 셸론 강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뒤 노브고로드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는 모스크바에 완전히 항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노브고로드는 이반 3세의 통치를 거부하고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서쪽의 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모스크바에 저항하려 했다. 분노한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에 대해 단호한 군사작전을 폈고 군대를 동원하여 노브고로드를 포위하였다. 이에 노브고로드는 곧 모든것을 포기하고 한번의 전투도 없이 항복하였다.
이반 3세는 자신을 반대하던 세력을 숙청하고 노브고로드의 상당수 보야를 가문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노브고로드의 모든 지역은 모스크바국의 종속되었다.
또 다른 공국은 트베리였다. 트베리는 노브고로드 보다는 덜 저항했다. 트베리 역시 모스크바에 대항하기 위해서 트베리와 폴란드 등과 협정을 체결하곤 하였는데 당시 미하일 트베리 대공은 폴란드의 카시미르 4세와 1483년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자 이반 3세는 군대를 이끌고 트베리로 진군하여 미하일을 압박하는데 이에 미하일은 그 협정을 부인하고 스스로를 모스크바국 통치자의 동생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2년뒤인 1485년 폴란드와 다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 밀정을 보내다가 중간에서 편지를 가로채여 계획이 모스크바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반 3세는 즉각 트베리를 포위하였고 미하일은 트베리내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자 리투아니아로 망명하였다. 이에 트베리는 모스크바에 전투 없이 항복하였다.
이반 3세가 획득한 크고 작은 영토들을 합쳐보면 대부분의 러시아는 모스크바국의 수중에 들어왔고 프스코프나 라잔처럼 모스크바 대공에게 협력적인 곳받에 남지않았다 .
이반 3세는 전 모스크바를 통일하였고 이제 그의 시선은 러시아 내부가 아닌 바깥을 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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