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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몽골의 반격과 러시아의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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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9. 1. 2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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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반격과 러시아의 독립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리투아니아와 몽골인들의 연합에 맞서 돈 강에서 대승을 거둔 쿨리코보 전투 이후에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뭉쳐 몽골인들이 씌운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는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몽골인들은 토크타미시 칸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여 러시아 땅으로 다시 쳐들어 왔다. 드미트리가 북부에서 병력을 소집하고 있는 사이에 이들은 모스크바를 포위하고 계략을 써서 성문을 넘었다.


모스크바 성내로 들어온 몽골군은 늘 그래 왔듯이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고 노획물을 잔뜩 챙긴채 돌아가 버렸다. 드미트리의 군대는 몽골과 싸우지도 못하고 불타버린 자신들의 수도 모스크바를 바라만 보아야했다. 공국의 수도는 불타고 파괴되었으며 땅은 죽어버렸고 자원은 메말라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드미트리는 킵자크 칸국의 종주권을 인정해야만 했고 그 대가로 킵자크 칸국은 드미트리의 러시아 대공자리를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가 쿨리코보 전투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간것은 아니다. 칸국의 러시아 장악력은 예전만큼 확고하지 못했고 이는 러시아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것을 뜻한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러시아의 대공으로서 그리고 모스크바의 지도자로서 부서진 수도를 정비하고 영토의 재건과 경제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1389년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러시아 대공의 자리는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아들 바실리에게로 돌아갔다. 바실리는 1391년 부터 1425년 까지 오랜기간 모스크바를 통치하면서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역시나 자신의 전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스크바의 영역을 확대하고 이익을 최대로 한다는점에서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새로운 분령지를 획득하고 수많은 개별 도시들을 끌어모아서 주변의 영지까지 흡수하였다. 조심스럽고 지적인 바실리 1세는 자신의 장인인 리투아니아 대공과의 전투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러시아의 영토를 서쪽으로도 넓히는데 일조하였는데 장인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인 비톱트 대공은 1408년 모스크바와 조약을 체결한 후 국경지대의 수많은 휘하 공들을 러시아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해야했다.


하지만 바실리가 언제나 승승장구한것은 아니였다. 바실리 1세 당시의 국제정세는 다양한 세력들이 공존하던 시기였기에 긴장의 끈을 놓칠수 없었다. 티무르 제국이 흥기하여 중동과 캅카스 전역으로 세력을 떨치던 시기에 이들은 1391년에 토크타미시를 격파하고 랴잔을 파괴하였다. 그 이후인 1395년 모스크바를 향해서 진경해오다가 오카강에 다다르기 직전에 자신들의 본거지인 스텝지역으로 되돌아가 바실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다. 1408년에 킵자크 칸국은 리투아니아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모스크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킵자크가 모스크바를 완전히 함락하지는 못 했지만 모스크바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바실리1세는 통치 후반으로 갈수록 칸과 좋은관계를 유지하여 공물이 아닌 ‘선물’을 보내면서 트집 잡히지 않게 주력하였다. 이렇게 모아진 여력은 리투아니아와 트베리로 돌려 이들과 경쟁하였다.


바실리 1세가 1425년 사망하면서 승계문제가 다시금 불거져 나왔다. 이번 승계문제의 당사자는 바실리 1세의 아들 바실리 2세와 그의 삼촌인 유리와 그 아들들 이었다. 유리공의 아들이던 코소이와 셰마카형제는 바실리 2세에 대항하였지만 1450년 진압되었다. 모스크바 사람들의 지지를 얻은 바실리 2세는 이들을 처리하고 이들의 분령지를 흡수하여 모스크바를 더 크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


어렵게 권력을 잡은 바실리 2세는 몽골과의 관계에서도 우위에 서려 했으나 독립을 주장하면 할 수록 몽골인들과는 계속 얽히게 되었다. 1445년 바실리 2세는 몽골인들과의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혀 몸값을 주고 풀려나기도 했다. 그러나 1452년 킵자크 칸국에서 도망쳐온 몽골 귀족이 러시아 대공에게 종주권을 바친것을 계기로 상황은 새롭게 반전된다.  바실리 2세는 투항한 몽골 귀족중의 한사람이자 징기즈칸의 후손인 카심에게 분령지를 주어 카시모프 공국을 건립하는데 이는 모스크바 대공에게 복속된 몽골세력이 생긴 매우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러한 킵자크 칸국의 분리 조짐은 곧 영토의 분할로 나타났는데 1430년에는 크림칸국이 독립하였고 1436년에는 카잔 칸국이 분할했고 바실리 2세의 다음 군주인 이반 3세의 시기인 146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이 떨어져 나갔다. 카잔 칸국은 투르크의 군대가 흑해 북부로 진격해오자 오스만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오스만의 일원이 되었다.

▲이반3세는 칸의 공납을 청구하는 서간을 찢어버리린다. 러시아의 위상회복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킵자크 칸국의 칸들은 이런 흐름을 저지하고 러시아의 종주권을 다시 확고히 확보하고 싶어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마드 칸은 1451년과 1455년 , 1461년 세번에 걸쳐서 모스크바 원정을 단행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는 얻지 못했고 1480년 이반 3세가 킵자크 칸국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거부하자 아마드 칸은 이를 응징하고자 한다. 그러나 양쪽 군대가 대치한 상태에서 겨울이 지나고 몽골군은 조용히 말머리를 돌린다. 그후 1502년 킵자크가 크림 칸국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 공식적으로 ‘타타르의 멍에’는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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