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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이반 사후와 쿨리코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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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9. 1. 1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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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이반 사후와 쿨리코보 전투

▲13세기 세력지도


이반 칼리타가 1341년 서거한 이후 그의 아들 시메온이 킵자크 칸국의 칸에 의해서 대공으로 승인받았다. 시메온이 가진 거만한 자라는 별명과 전 러시아의 대공이라는 점에서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다른 지배자들에 비해서 얼마나 강력해졌는지를 알 수 있다.  

시메온 역시도 전임자들이 했던것처럼 모스크바 공국을 크게 만드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353년 서른 여섯의 젊은 나이에 죽게되는데 당시 유럽 전역에 유행하던 흑사병이 원인일 것으로 추측된다.


시메온이 죽자 그의 후계자로 병약한 동생인 이반 크라스니가 대공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이반 크라스니는 이반 2세로도 불린다. 이반 2세의 통치기간 동안 킵자크 칸국은 내부에서부터 분열하기 시작했다. 1357년 부터 20년동안 20명이 넘는 칸들이 교체되거나 살해당했고 킵자크 칸국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러시아의 서쪽에 위치한  올게르드라는 군주가 이끄는 리투아니아 세력은 점점 커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반 2세가 죽고 난 뒤 그 후계자는 이반 2세의 아들 드미트리가 되었다. 후계자 계승과정에 키예프 시절부터 있었던 삼촌 - 조카사이의 갈등이 있었으나 (심지어 이름도 같은 드미트리) 부자승계로 굳어진 모스크바의 전통에 따라 아들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대공으로 즉위하였다. 돈강의 드미트리로 알려진 드미트리 대공은 1389년 사망할때까지 모스크바를 30년간 통치하였다.


드미트리가 유명한 이유는 모스크바를 둘러싼 수많은 전투에서 모스크바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서쪽의 세력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는 트베리와 대항하거나 리투아니아가 쳐들어오자 공세를 둔화시키고 강화한 다음 트베리를 파괴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드미트리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바로 타타르의 멍에인 킵자크 칸국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가 몽골에 이긴 최초의 전투이기도 했다. 쿨리코보 전투 또는 쿨리코보 평원의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의 서막은 전투가 일어나는 1380년 이전부터 있어왔다.


당시 드미트리 대공은 트베리의 미하일을 대공으로 삼으려는 킵자크의 결정을 번복시켰으며 불가 불가르 공국이 킵자크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자 그들을 공격하여 파괴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스크바와 몽골인들의 충돌은 1378년 보자 강둑에서의 전투로 빚어지며 절정에 치달았다. 킵자크 칸국의 군사지도자인 마마이는 모스크바를 공격하기로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협공을 하기위해 병력을 돈 강 상류로 움직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리투아니아와 킵자크의 병력이 합쳐지는것을 막기위해 돈강 상류로 먼저 움직였고 그곳에서 킵자크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1380년 9월 8일에 벌어진 이 전투는 킵자크 칸국의 완벽한 패배로 끝났다. 이곳의 지형은 여러 개울과 구릉지대가 만나는 장소였기에 몽골인들이 자랑하는 기마부대의 기동성이 저하되는 지형이었다. 게다가 드미트리의 예비부대가 매복작전으로 몽골군을 기습하면서 승기는 모스크바 공국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이틀뒤 쿨리코보에 도착한 리투아니아군은 싸우지 않고 다시 자신의 세력범위로 돌아갔다.


러시아인들이 거둔 이 승리는 몽골의 불패신화를 깨트렸다. 이 승리로 인해서 드미트리는 전 러시아의 수호자로 떠올랐고 교회와 공들의 축복을 받으며 모스크바는 러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진정한 공국이 되었고 드미트리는 그 시대를 이끄는 군주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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