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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이반 3세의 러시아 통합이후 대외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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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9. 2. 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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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3세의 러시아 통합이후 대외정벌

저작자표시: David Liuzzo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 진한 순서대로 (1300)-(1390)-(1505)-(1533)


이반 3세는 러시아의 분령지들을 모두 흡수하면서 모스크바국이 곧 러시아가 되게끔 만들었다. 그의 야망은 러시아의 분령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스크바 대공들은 키예프 루시 시절의 모든 영토가 모스크바국의 세습재산이라 믿었다. 키예프 시절의 정통성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이반 3세는 대외관계에서 명확히 했으며 이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493년에 키예프의 옛 땅을 포함하는모든 러시아의 군주인 고수다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키예프 계승의식은 리투아니아와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리투아니아는 키예프의 서부와 남서부영토를 기반으로 지배권을 확대했다. 따라서 리투아니아 역시도 키예프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반 3세가 노브고로드와 트베리를 획득하여 굴복시키자 리투아니아와 모스크바의 경계지대인 오카강 상류의 많은 분령지들은 자신의 주인을 바꾸었다. 그들은 리투아니아를 섬기다가 모스크바국이 강대해지자 모스크바국에 충성하였다. 리투아니아는 이들을 무력으로 점령할 수 없었고 1494년 협정을 통해서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남쪽의 분령지들이 모스크바 쪽으로 붙었을때 1500년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베드로샤 강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리투아니아 지휘관을 포로로 잡고 전리품을 획득하여 돌아갔다. 이 패배는 1503년 평화조약으로 나타났는데 이 조약에서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에 점령당한 땅의 종주권을 모스크바에 내주어야했다. 그리하여 이반 3세는 스몰렌스크 일대와 폴로츠크 지역, 그리고 체르니고프와 세베르스크의 많은 부분을 영토로 편입했다. 또한 리보니아 기사단을 대상으로했던 전쟁은 1503년 새로운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모스크바국의 영토를 한층 더 넓게 만들었다.


이반 3세는 비잔티움제국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바티칸의 후원을 받았다. 바티칸은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투르크인들과 연합전선을 펼치고 싶었지만 그 결혼은 러시아 대공인 이반 3세의 권위와 위상을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반 3세는 자신의 문양인 성 게오르기에 비잔티움의 쌍두독수리를 덧붙였고 나아가 차르라는 고귀한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독수리와 차르라는 호칭은 이때 이반 3세때 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반 3세는 러시아 최초의 민족적인 군주로 불려진다. 이반 3세의 아들 바실리3세 역시도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하여 모스크바의 땅을 불려나갔다. 1511년 프스코프 공국을 모스크바에 합병하고 1517년에는 랴잔의 절반을 마저 모스크바에 합병하였다. 이후 오카강 상류의 군소 분령지를 모두 통합하였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리투아니아에 대적하였다. 또한 바실리 3세는 스몰렌스크를 향해 3번의 원정을 감행하면서 마침내 1514년에는 스몰렌스크를 점령하였다. 한때는 종주국이였던 카잔 칸국까지 군사적 압력을 가하면서 국경을 확대했고 카잔 칸국의 주요 정파들중에 친러시아파를 지원했다.


이반 3세를 거치며 바실리 3세에 이르러 모스크바국은 러시아국에서 새로운 지위로 올라섰고 그를 통해서 대외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과 투르크의 술탄 술레이만, 심지어 무굴제국의 바바르와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또한 이반 3세때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재건축하여 러시아의 위엄을 내외국인에게 각인시키기도 했다.


이반 3세와 바실리 시기를 거치며 러시아는 민족적인 색채를 띄기 시작했고 이전과는 다르게 리투아니아에 충성하는것을 반역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분령지에 대해 중앙집권적인 의무를 부과하다 보니 사회 각층에서 갈등이 미어져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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